보험법 개정을 우려하며

말기 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는 환자 가족에게는 환자의 상태를 자세하게 알려주지만 환자 본인에게는 직접 알리지 않거나 혹은 알리는 않는다. 상태를 알리지 않는 것은 환자에게 절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알리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의 질병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생각하고 있다. 만약 환자의 질병 정보를 마음대로 제공할 수 있게 된다면 국민의 2/3가 질병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국회에서 질병정보를 민간보험회사에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보험업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그 여파가 크게 우려된다. 개정안은 건강보험관리공단 및 심사평가원이 보유하고 있는 국민의 질병정보를 보험개발원에 제공, 민간보험회사가 이 자료를 공유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노령화 시대를 대비해 민간보험을 활성화하겠다는 재정경제부의 계획이지만 국민의 사생활 보호는 뒷전에 두고 민간보험업계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처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2년 재경부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및 심사평가원이 보유한 개인질병 정보를 보험개발원에 제공해 민간보험을 활성화한다는 내용을 보험업법 개정안에 담았다가 국가인권위원회의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권고로 삭제된 바 있다. 그런데도 다시 이를 추진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심사평가원에는 의료보험으로 진료받은 모든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때 이 진료 기록이 민간보험업계에 제공된 일도 있었다. 보험모집인은 신규가입이나 보험금 지급사유가 발생하면 진료기록을 신청해 병력을 보고 가입을 해지하거나 이를 트집잡아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등 부작용이 심각해 폐지된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질병정보가 공개될 경우 개인의 질병정보가 제3자에게 노출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 즉 보험가입의 문호가 좁아지고 병력 노출로 결혼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개인의 신상정보 보호가 크게 문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일부 민간회사에서 질병정보를 공유할 경우 이 자료가 유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건강보험공단의 진료기록을 원천적으로 삭제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까지 펴고 있는 형편에서 민간보험에 질병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위험스러운 일이다.

1980년 국제협력기구는 사생활보호와 개인정보자료의 국제유통 지침에 관한 이사회 권고안을 채택하여 모든 가맹국들로 하여금 국내법 제정을 권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사생활보호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국회 재경위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환자 질병정보를 민간보험회사에 제공토록 하는 보험업법 개정을 발의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험업계나 정부는 보험사기를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보완과 강화에 힘쓰는 것이 바른 길이다.

용왕식/국민건강보험공단 고양지사장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