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터뷰 / 97세 고양신문 독자 경여필씨 -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을 묻다

맨 눈으로 신문 구석구석 읽고 텔레비전 토론 프로 새벽까지 꼭 봐

무병장수’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다. 고양신문 창간 20주년을 맞아 우리 주변에서 무병장수의 꿈을 이룬 이웃을 찾아보았다. 우선 고양신문 독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독자를 찾았다. 97세 경여필씨 였다. 경여필씨는 돋보기도 안 쓴 채 신문을 줄줄 읽어 내렸다. 귀 역시 밝았다. ‘무병장수’의 비결을 물었다. 뭐 별 특별한 것은 없다고 한다. 고기도 야채도 모두 즐겨먹고, 특별히 소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도 일정치 않다고 한다. 그래도 비결이 있을 것 같다고 집요하게 묻자, 한 마디 던진다.

“남들한테 피해주지 말고 곱게 살면 되지.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 가지야.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피해주지 말고 서로 이롭게 잘 살아야지.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야. 난 건강 때문에 자식들한테 피해주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며 살았어. 지금도 그렇고.”

경여필씨는 97세의 나이지만 아주 곱다. 하얀 모시 적삼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경여필씨는 옷매무시 하나, 몸 짓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여필씨가 집보다 오래 머무는 마을 노인정 친구들은 “노인네가 얼마나 깔끔하신지, 정말 남들한테는 손톱만큼의 불편함도 주지 않는다”고 한마디씩 건넨다.

“다 자식들 위해서야. 내가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 자식들이 욕먹잖아.” 자식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부모는 100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도 오직 자식 생각뿐이었다.

▲ 고양신문 독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경여필씨(97세)는 돋보기도 없이 신문을 줄줄 읽어내려가고 TV토론을 새벽까지 꼭 본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아픔, 가족에 대한 책임감
경여필씨의 고향은 일산 정발산 바로 아래 있었던 말머리마을, 마두리였다. 학문이 깊은 선비였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는 마을 서당을 운영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경여필씨 열 여섯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부터 혼기가 찬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정여필씨는 시집을 안 간다고 우기고 우겼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거나 하나 있는 남동생이 장가를 갈 때까지는 집을 떠날 수 없다고 고집하던 경여필씨는  스물 두 살이 되어서야 시집을 갔다. 늦은 나이였다.

능곡의 종가집 며느리리가 된 경여필씨는 홀로계신 아버지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70여년이 흐른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픔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간 경여필씨는 아버지 얼굴만 보고 무거운 걸음을 돌려야 했다. 바로 다음날이 시어머니 환갑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서 집안의 큰 일을 잘 마무리하고 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시어머니 환갑잔치가 끝날 때까지 절대  어두운 빛을 내지 말고 큰 일을 잘 마쳐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하셨다. 시어머니 환갑 잔치가 끝난 저녁, 친정에서 다시 사람이 왔다. 아버지가 어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정여필씨가 왜 오늘에야 왔느냐며 통곡하자 그는 “아버님이 잔치가 끝날 때까지 절대 알리지 말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

시집살이는 역시 힘들었다. 종가집 큰살림을 맡으면서 5남매를 키웠고 큰댁의 조카들 3명까지 돌보아야 했다.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무서워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놓을 수 없었고 일제시대 때는 방앗간을 갈 수 없는 까닭에 돌절구에 보리를 찧어 먹으며 살아야 했다. 식구가 많아 보리 7가마를 찧어도 순식간에 없어졌다. 고생고생하며 자식들 다 키워 출가 보낼 무렵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56세였다. 힘겨울 때마다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면 이집 저집 돌며 재미있게 살아보자고 약속했는데, 남편이 일찍 떠나니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다. 집안일이고 밭일이고 잠시 쉴 틈도 없이 부지런히 일했고 5남매는 모두 장성해 출가했다. 이젠 한 시름 놓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 찾아왔다. 큰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픔이 전혀 줄지 않고 더욱 커지기만 한다. 당시 도의원 선거에 출마해 떨어진 큰 아들은 상심이 컸는지 병을 얻었고, 어머니는 그간 모든 인생의 고통을 합쳐도 비교할 수 없는 끝없는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큰 아들 집에 살고 있다. 홀로된 며느리와 벗하며, 며느리한테 조금이라도 짐이 되는 일은 피하며 살고 있다.

노인대학 노인정에서 맞는 또 하나의 잔잔한 인생
경여필씨는 선비 집안에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은 글을 익히지 못했다. 정여필씨가 글을 배운 것은 자식들 다 키우고 난 후, 60세가 훌쩍 넘어서였다. 마을 노인대학에 입학한 정여필씨는 늦은 나이지만 배우고 싶은 열망이 높아 금세 한글을 깨우쳤고 노래와 춤, 교양과목까지 모두 우등생이었다. 노인대학에 다닌 햇수는 무려 27년. 17년 동안 다니며 모든 과정을 졸업했고 그래도 또 배우고 싶어 10년을 더 다녔다. 노인대학에서 받은 상장만 해도 수 십 개가 넘는다.

“난 90이 넘어도 배우는 일이 재밌고 누가 좋은 것 가르쳐주면 정신이 버쩍 드는데, 70대 80대 젊은 사람들이 졸고 하품하는 것 보면 좀 안타까워. 지금 생각하면 노인대학 다닐 때가 제일 좋았어. 이젠 오고 가는 일이 힘들어 더 못 다니지.”

경여필씨는 90세가 넘어서까지 노인대학을 다녔다. 노인대학 옆에는 경로당이 있어 강의가 끝나면 경로당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지내곤 했다. 지금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경로당에 출석하는 우수 회원이자 최장수 회원이다. 조용조용하면서도 이웃과 사귀는 일을 즐거워하고 남들한테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없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정여필씨를 두고 경로당 회원들은 ‘세상에 흠 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어르신’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경여필씨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신문을 보는 일이다. 노인정으로 들어오는 노인신문과 고양신문은 꼬박꼬박 읽는다. 눈이 얼마나 밝은지 맨 눈으로 깨알 같은 글씨를 줄줄 읽어 내린다. 70대 80대 젊은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를 대신 읽어주는 것도 정여필씨 일이다. 경여필씨는 다리가 좋지 않아 이젠 집과 노인정 밖에 오고가지 못하는데 고양신문을 보면 이 동네 저 동네 소식을 다 볼 수 있어 좋다고 한다.

또 하나, 경여필씨의 중요한 또 하나의 일과는 텔레비전을 보는 일이다. 특히 뉴스와 토론 프로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본다. 토론 프로를 다 보면 새벽 1시가 넘지만 다 보고 잠자리에 든다.

“사람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챙겨서 보고 들어야지. 그래야 사람들하고 할 이야기도 많고 생각도 젊어질 수 있잖아. 요즘 정치 보면 난 정말 할 말 많아. 어떻게 그렇게 자기주장만 하는지. 토론하는 이유는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인데, 어느 토론 프로에서도 조금이라도 합의하는 일는 한 번도 못 봤어.”

경여필씨는 다른 어떤 일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위치에서 한 유권자로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표현해 왔고 또 투표로 참여해왔다.

“이 나이 되도록 수 십 번의 투표를 했지만 한 번도 내가 찍은 후보가 떨어진 적이 없어. 근데, 단 한번 내 아들 선거에서는 내가 졌지. 왜 하필...”

경여필씨는 먼저 떠난 아들과 연관된 이야기가 나오자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내 아들 영도가 정치를 했다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똑똑했던 아들에 대한 기대를 아직도 가득 품고 있다.

내 건강 지키는 것이 가족에겐 가장 큰 이로움
경여필씨의 소망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남아있는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건강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큰 아들이 떠난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는 작은 아들이 대견스럽고 고맙기만 하다는 어머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아들 회사에 찾아가 얼굴을 보곤 했는데, 이젠 쉽지 않다.

아들 영표씨는 90세가 넘은 어머니가 어느 날 회사로 불쑥 찾아오시면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언제일지 모르는 그 날이 기다려지곤 했다고 한다. 아들에게 물었다. 어머니 무병장수의 비결은 무엇인지. 

“한 평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신 집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집오시기 전에는 아버지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시집오신 후에는 5남매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단 한순간도 정신을 놓지 않으시고 사셨죠. 나이 드셔서는 아프면 자식 고생시킨다는 생각에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몸과 마음을 챙기십니다.”
아들은 또 한 가지를 꼽는다.

“어머니는 텔레비전 뉴스를 꼭 보셨고 한글을 깨우치신 후부터는 항상 신문을 즐겨 읽으셨습니다. 신문은 구석구석 다 보셔요. 고양신문 보신 후에는 가끔 전화도 하셔도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시거나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시기도 하십니다. 신문 보시는 일이 정신을 맑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정여필씨는 세상을 더불어 사는 일에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다. 가족과 이웃, 또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항상 노력했다. 말 한마디, 옷차림 하나에도 가족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었고 자신의 모든 생활이 가족과 이웃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치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왔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이웃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참여적인 시민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이로운 영향을 미치며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삶의 자세가 바로 ‘무병장수’의 비결이었다.

<이영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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