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건설 반대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

▲ 일산신도시건설 결사반대투쟁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설원규, 이준웅, 이상목, 설재영씨 등이 모여 지난 과거를 회상하는 자리를 가졌다.
“‘일산신도시건설 결사반대투쟁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정부발표가 난 3일 후인 1989년 3월 30일이었습니다. 보상가가 나오기 훨씬 전이었으니 신도시건설 반대는 보상가 불만이 아니라 수백년간 살아온 정든 땅에서 하루아침에 쫒겨난다는 점 때문이었죠.”

신도시 건설 발표가 있는 지 20여년이 지난 7월 초, 당시 일산신도시건설 결사반대투쟁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설원규, 이준웅, 이상목, 설재영씨 등이 모여 지난 과거를 회상하는 자리를 가졌다. 신도시건설 후보지로 일산이 선정되자 3월 30일, 백석동에 마을 이장 21명과 몇몇 주민들이 참석해 격렬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들은 씨족마을을 형성해 오랫동안 살아온 일산에서 선산이 없어지고 정든 이웃과 친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투쟁위에서 앞장 설 설원규, 강호남, 최승대, 서정주씨 등을 대표로 뽑고 5월 1일 반대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5월 1일, 백마초등학교에 가득 모인 5000여명의 주민들 앞에서 설원규 투쟁위 회장은 “정발산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우리의 1만여 눈동자는 맑은 하늘의 모습과는 달이 근심과 시름이 가득합니다…”라며 주민들의 감동을 이끌어 내었고, 집회가 끝나자 모두들 걸어서 능곡사거리를 거쳐 행주대교를 넘고 88올림픽도로로 진입하여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고양경찰서장은 주민들이 시청으로 올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기에 시위대는 손쉽게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서경찰서에서 출동한 전경들에 의해 행진이 저지되고 몇 시간 대치 끝에 일산으로 돌아왔지만 주민들의 고향땅에 대한 애착과 사랑은 이처럼 엄청나게 컸었다.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도시건설은 추진되고 다음 해에 토지보상이 진행되면서 반대투쟁위의 활동도 잦아들게 되었지만 반대투쟁위가 벌인 활동들은 소위 대규모지역개발방식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개발은 보상가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주민들이 삶을 이어나가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최근의 용산사태에서도 보여주는 것같다. 

이날 회고의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아온 주민들이 계속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집단이주단지를 보장해 준다든지 하는 대책이 필요했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평당 8만9000원으로 받았던 보상가는 이후 집안 분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부자, 형제, 친족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 온 우애가 깨어지고 지역사회의 윤리도덕이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참석자들은 개탄했다. 보상이 시작되자 말없이 밤새 사라진 일가 친척들도 있었고, 그 후 지금까지도 못 만나는 경우도 있다고. 또 평당 8만9000원으로 받았던 보상가도 별 경험이나 기술이 없는 자식들이 그 돈으로 사업을 한다면서 말아먹은 경우도 매우 많았다.

설원규 회장은 “당시 보상받은 사람들에게 1/3은 예금으로, 1/3은 농사지을 주변 땅에, 1/3은 상가나 건물에 투자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농사나 지어왔던 당시 주민들이 재테크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당시 신도시 개발로 떠났던 주민들은 다시 단독주택단지나 아파트 분양으로 신도시로 많이 돌아왔다. 이들은 신도시가 지금은 편의시설과 의료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살기 좋은 곳임에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정든 이웃과 친족, 그리고 선산을 두고 떠나야 했던 신도시 건설에 지금도 찬성하지 않는다며 잃어버린 옛 일산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윤영헌 전문기자  yyhy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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