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딛고 새로운 시작에 발 내딛는 축산 농가

지난 해 겨울, 대한민국 전국이 다함께 수백 마리가 한구덩이에 묻히는 끔찍한 악몽을 꿨다. 어떤 이는 사람이 만든 재앙이라 하며 꺼져가는 수많은 생명에 분노했고 또 어떤 이는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아픔과 분노가 어디 자식같은 소 돼지를 묻는 축산농민의 심정만 했을까. 30년 평생 낙농에만 전념해온 이남엽(58세)씨는 아들과 함께 키워온 소들을 살처분하던 그 날만큼은 잊을 수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이씨의 안내로 들어선 축사 안은 황량했다. 그의 표현으로는 처량했다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축사 안을 꽉 채우던 70여 마리 소들은 땅 속으로, 그리고 이씨의 가슴 속에 묻었다. 대신 입식 준비를 위해 말끔해진 축사 내에 10여 톤의 톱밥들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산을 이루고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딴 이곳 ‘인봉한우’ 축사는 이남엽씨가 아들 이인봉 씨(31세)의 경영수업 차원에서 2008년에 신설한 곳이다. 쉬운 일만 찾는 요즘 젊은이들에 비해 여간 대견한 아들이 아니었다. 지난 해 첫 출하에는 전국 상위 10% 안에 들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올해 초 역시 30여 마리의 출하를 앞두고 구제역이 인봉한우 축사를 덮친 것이다. 이씨는 “아들이 결혼이라도 했으면 부부가 서로 마음을 다독이며 위안이 됐을 텐데 혼자 상심하는 모습을 곁에서 보기가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담배를 손에 들고 담담한 목소리로 지난 수개월을 이야기하는 이남엽씨와 그런 주인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했던 애완견 삐삐

경북 안동에서 첫 구제역이 터지고 부랴부랴 백신을 맞췄지만 닷새 만에 살처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씨는 “이미 인근 30여 농가까지 모두 오염된 상태였다”고 당시의 허탈한 심정을 다시금 곱씹었다. 

매일 칼바람을 맞는 듯했던 지난 겨울을 보내고 이제 새 식구를 맞아들이기 위해 입식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씨의 축사는 입식 허가를 위해 검사를 나온 경기도 방역관이 감탄했을 정도이다. 마치 구제역을 잊기 위해 새로 만든 축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깨끗한 축사 역시 구제역의 아픔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살처분 이후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이씨. 저녁 11시 쯤 잠이 들어 충분히 잤다고 생각하고 눈을 뜨면 시계는 새벽 1시. 하지만 이씨는 다시 잠들 수 없었다고 말한다. “꿈 속에서 소가 새끼를 낳고 뛰어다니고 젖소가 젖 짜달라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 막상 축사에 나와보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잠 들지 못하고 그냥 일어나버려”

덕분에 지난 겨울 추위 속에서도 애완견 ‘삐삐’를 데리고 새벽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어김없이 발길을 축사로 향했다. 스트레스로 아직까지 머리 한쪽이 눌리는 듯한 감각에 시달린다는 이씨는 당시 망연자실해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이대로 가다가는 폐인이 될 것 같아 청소하는데만 전력투구 했다”고 말한다.

구제역이 휩쓸고 간 축사를 원상복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해 뿌려놓은 생석회 가루는 동력 살분기로도 쉬이 빠지지 않아 일일이 쓸어다 일륜차에 담아 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축사 청소를 위해 새로 구입한 고성능 분무기로 천장과 바닥을 7~8번을 쏘아대니 그 수압에 목이며 팔이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청소를 끝내고는 고양시 농업정책과에서 제공한 EM제 1톤으로 축사를 도포하다시피 하고 가성소다를 희석시켜 뿌리고 파이프 부식을 막기 위해 씻어냈다. 반복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파이프를 틈틈이 빠짐없이 씻어내고 다시 양조식초 3박스를 사다가 1000여 개가 되는 파이프들을 일일이 철 수세미로 닦아냈다.

이남엽씨는 “그러고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아 페인트 한말짜리 10개를 사다가 다 다시 칠했어. 밥만 먹으면 축사에 와서 청소했지”라고 말한다.

남들보다 빨리 입식 준비를 시작한 이씨는 누군가의 조언 없이 그저 책을 보며 깨끗이 하는 데만 집중했다. 덕분에 방역관의 감탄사가 나올 정도의 말끔한 축사를 이뤄냈다. 지금은 인근의 입식 허가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농가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새로 송아지를 들일 축사에 정성스레 톱밥을 정리하고 있는 이남엽씨. 30년 낙농 세월에 작년처럼 가슴 아팠던 적이 없었다고.


새로운 시작에 망설임도 있었다고 한다. 축산농가들은 이미 낭떠러지에 있는 심정. “앞으로 한발 잘못 내딛는 순간 망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상액도 시기도 순탄치만 않은 상황에 새로운 소를 사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기르던 소는 성향이 어떻고 내력을 다 아는데, 다른 이가 기르던 소를 신경 써서 사오는 것도, 그걸 내 소로 만드는 과정이 보통 힘든게 아니야”라고.

게다가 지난 5개월 동안 한우를 기피하고 미국 소고기에 입맛이 길들여진 소비자들로 인해 지금 소를 사온다 한들 20개월 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심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 정부에서 내놓은 ‘축산업 허가제’는 농가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씨는 “쓰러져있는 농민들을 법으로 옭아매려고만 한다. 다시 일어서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으로 가야하는데 보상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규제만 하려고 하니 농민들을 축산업에 종사하게 하는건지 못하게 규제하는 건지.”

어렵고 힘들지만 30년 동안 이어온 업을 놓을 수 없다는 이남엽  씨. “농민들의 삶이라는게 그런거지. 항시 하던거 하다 세상 마치고 노동력으로 먹고 살다 죽는거...”라며 무심하게 꺼내는 말 속에는 낙농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면서 접하는 모든 것이 농민들이 생산해내는 고기와 야채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며 “그만큼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는 1차 산업에 대해 정부도 국민들도 외면하지 말아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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