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달력엔 항상 ‘장애인의 날’이라고 적혀있다. 관공서는 이 날 장애를 ‘극복’한 사람에게 상을 주거나 장애인 가족을 ‘희생’으로 잘 돌본 사람에게 상을 준다. 그마저도 아니면, 장애인을 불러다 노래자랑이며 각종 행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우리는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고 부른다. 여전히 이 속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 살아가고 있는, 세상밖으로 나오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떤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고, 어떤 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한다. ‘장애자’라는 표현에서 ‘장애인’이란 표현으로 바뀐 지는 그리 오래돼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선의의 표현으로 ‘장애우’란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이 호칭 역시 장애인이 자신을 지칭하지 못하는,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그저 호명하기에 편한 표현일 뿐 ‘올바른’ 표현은 아니다.
한편, ‘일반인’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장애인을 ‘일반적이지 않은, 비정상적인’ 존재라고 전제하는 것이기에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비장애인’이 올바른 표현이다. 이처럼 말에 전제되어 있는 의미가 있다.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이큰 소리로 내뱉었던 몇 마디 말 속에는 경비과장이 장애인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 알 수 있는 의미들이 있었다. “오늘은 장애인의 생일이니 침착하게 대응하라”며 경찰들에게 이야기 한 것은 관공서가 장애인을 불러다 상주고, 행사하는 일회성 이벤트의 대상으로 정도만 본다는 거다.
장애인은 4월 20일이 되면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거리에서 싸워왔고,  노인, 어린이, 유모차를 끄는 사람 등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지하철 역 안에 엘리베이터도 생기고 건물의 턱들도 조금씩 없애며 ‘이동권’을 얻을 수 있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교육청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면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비장애어린이와 통합교육도 받고, 장애어린이가 소풍도 갈 수 있게 필요한 조치들을 학교가 취하게 된 거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인 혹은 장애인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부양의무제’나 ‘장애등급제’ 등은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거리로 나선 것이다. 힘겹게 거리로 또 나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거리로만 나서야 존재를 보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생일과 같은 날’ 운운하는 것은 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경찰들에게 “너희도 장애인이 될지도 모르니 잘 대처하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장애인의 90% 정도는 후천적 장애이니 너희 모두 예비장애인이라 생각하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잘 대처하라는 뜻이면 참 좋겠다. 그 자리에 있었던 나에겐 “이 행진을 막지 않으면 너희도 장애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이상하게 꼬여서 들렸으니까. 경찰은 인도를 막고 있는 경찰에게 길을 비켜주라고 장애인들이 온 몸으로 항의하게 만들었다. 다리와 다름없는 휠체어를 함부로 만지고 장애여성의 입에서 “나도 여자예요. 손대지마세요”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112에 신고를 해서 통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더니 “담당자랑 일반인이 건널 수 있도록 얘기하고 있다”고 대답하더라. 일반인이라는 옳지 않은 표현을 지적하는 것은 제쳐두고, 무슨 소리냐, 길 건너려는 장애인들도 같이 가게 길을 열어야한다고 소리쳤다. 제발, 우리는 늘 4월 20일에 거리에 있을 테니, 당신 공권력들은 장애인평등교육 좀 받고 법 좀 준수하시라.
신지혜 노동당 고양파주지역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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