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에 사는 문학작가를 찾아서 5. 소설가 정수남

 

▲ 일산동구 풍동 숲속마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정수남 작가는 평양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의 문제는 그의 작품에 드러나기도 한다. 정 작가가 쓴 일명 ‘모택동 모자’는 작가로 있는 한 함께 쓰자고 천승세 작가와 약속한 모자이기도 하다. 사진=이성오 기자
고교 때부터 문학친구로 어울리며 교류 
지금까지도 ‘소설이 뭔가’ 스스로 질문
“밥과 문학 타협시키는 짓 예술혼 훼손”

 

해방둥이인 정수남(70세) 작가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터지던 1950년 겨울, 6살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험난한 피난길에 올랐다. 고향인 평양에서의 기억은 어렴풋하다고 했지만 몇 가지 각인된 추억은 있었던 모양이다.

“평양 보통강(대동강 지류)에 있는 대타령이 고향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정미소를 했어요. 말하자면 부르주아였지요. 날마다 소달구지가 오가던 정미소에서 놀던 기억, 정미소 뒤편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에서 당시 귀하던 시소를 타고 놀던 기억이 나요.”

작가는 아버지 형제,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피난길 행렬에 올랐지만 할아버지와 몇몇 가족은 북에 남겨둔 이산가족이자 실향민이다. “6살이던 놈이 이제 70살이 됐는데 그분들 다 가셨겠지…”라며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북에 남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을 거예요. 계급이 낮았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겠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큰 고통은 안 당했을 겁니다. 인심을 잃지 않으셨던 분이거든요”라는 말을 이었다.

아동작가 윤석중 칭찬에 꿈 키워
남한으로 피난해 가족과 함께 서울 후암동에 정착한 작가가 문학과 인연을 처음 맺은 것은 남대문초등학교 시절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에서 처음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칭찬 몇 마디를 들었을 때였다. 당시 교장선생님은 ‘어린이날 노래’, ‘퐁당 퐁당’, ‘고추 먹고 맴맴’ 등을 지은 윤석중 아동문학가였다. 

“상이라고 해봐야 종이로 된 상장과 공책 몇 권이었어요. 그렇지만 교장 선생님이 안긴 칭찬이 더 큰 상이었어요. ‘너는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큰 작가가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까.”

이미 아동문학가로 이름이 드높은 윤석중 선생님의 단 몇 마디 칭찬은 부모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말썽부리는 4형제 중 둘째로 유년시절을 보내던 10살의 소년에게 문학적 재능을 꿈틀거리게 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문예반 친구들과 어울리며 더욱 여물었다. 정수남 작가의 용산고등학교 동기로는 ‘저문날에 삽을 씻고’의 시인 정희성, ‘왕과 비’, ‘인수대비’를 쓴 극작가 정하연 등이었고 1년 후배로 소설가 윤후명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서울고등학교를 다니던 소설가 최인호와도 어울리기도 했다. 작가는 “우리끼리 문학을 놓고 이야기하며 다투던 그 때의 열정이 지금은 많이 사그라진 것 같아요. 문학 외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던 시절이었어요”라고 고교시절을 회상했다.

작가는 특히 2년 전 작고한 최인호에 대해 “인호는 야물딱지고 독한 놈이었어요. 학창시절 인호집에 놀러가기도 하고 더러는 그 집에서 자기도 했어요. 결혼해서도 우리 아이 돌찬치에 오기도 하며 친하게 지냈죠. 인호는 ‘별들의 고향’이 히트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저 자식, 부럽다’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 없어요”라고 말했다.

분단문학 작가로 고양작가회의 이끌어   
현재 일산동구 풍동에 거주하는 정수남 작가는 문단에서 ‘분단문학’을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작가의 1984년 신춘문예 등단작인  ‘접목’ 을 비롯해 몇몇 소설이 분단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6살 때 부모 손에 이끌려 남한으로 피난 내려올 때 겪은 전쟁의 아픔과 그 이후 60여 년 실향민으로서의 삶은 그의 문학에 스밀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피난시절 강 얼음판이 깨져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그것을 외면하면서 강을 건너야 하는 피난민의 참담한 기억은 작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삶과 죽음의 고비가 거듭된 피난길에서 6살 당시 작가에게 눈병이 도졌지만 부모는 손볼 틈이 없었다. 아픈 한 쪽 눈은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도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가져다 준 상처였다.

“작가로서 분단이라는 주제는 태생적으로 이미 저에게 주어진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통일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는 양보할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통일은 천천히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난 후에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통일은 최우선 순위에 놓여야 하는 것이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신 딱 한마디 말씀이 있습니다. ‘고향인 북녘에 묻어다오’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제 나이 마흔이 조금 넘었을 때인데 통일 되면 북녘으로 아버지를 이장시켜야지라고 마냥 생각했어요. 이제 제 나이 일흔이 됐어요. 통일이 더 다급해진 거죠.”

정수남 작가가 회장으로 있는 ‘고양작가회의’는 예술성보다 참여성을 중시하는 문학단체다. 문학이 통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등을 고민하는 문학인들이 모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된 이후 이 단체의 고양지역 지부격으로 10년 전 태동해 이어져 온 것이 ‘고양작가회의’다. 고양작가회의에는 현재 40여 명의 지역 문인들이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문학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정수남 작가는 『시계탑이 있는 풍경』, 『길에서 길을 보다』, 『행복아파트 사람들』 등 여러 소설집을 펴냈다. 제2회 자유문학상, 제15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가는 등단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리고 일산문학학교 대표로서 문학을 가르치지만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여전히 던지고 있다. 그는 “‘나에게 소설이 뭐냐’라는 질문은 작가정신을 되새김질하는 질문이죠. 작가는 늘 긴장해야 합니다. 정신이 해이해지면 작가의 외투를 벗어야 합니다. 작가의 외투를 입고 있는 한 작가는 긴장의 시선을 유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정수남 작가는 소설집뿐만 아니라 『병상일기』 등의 시집도 펴냈다. 병상일기는 말하자면 시로 쓴 작가의 투병기이다. 작가는 위암을 앓아 2006년 위의 4분의 3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았다. 위암 투병을 하던 당시 자가면역질환으로 치사율 50%가 넘는 ‘천포창’이란 병도 동시에 앓으면서 죽음 직전까지 경험했다. 작가는 동시에 앓던 두 가지 병을 극복하고 난 다음 여생은 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병을 극복하는 데 있어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종교였다. 작가의 집안은 대동강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부터 신앙을 가졌던, 3대째 이어져 온 기독교 집안이었다. 작가의 바로 밑 동생이 목사이고 그 역시 장로다.

잘 팔리는 소설을 써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구가 작가에게는 없을까. 정수남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문학을 해서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일찍부터 대중소설을 쓰는 작가가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밥과 문학을 타협시키는 것은 문학정신과 예술혼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설사 부업작가가 되더라도 문학정신은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고통을 수반하는 문학이야말로 자신을 거듭나게 한다고 믿는 작가, 문학을 했기 때문에 행복했다고 여기는 작가가 있다. 정수남 작가는 그런 작가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