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에 사는 문학작가를 찾아서 7. 시인 전영관

세월호 사건에 가장 민감했던 시인
건축학과 출신으로 47세 나이 데뷔
“시인은 생활인일 뿐, 자격 아니다”

전영관(54세) 시인은 지난해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시인 중 한 명이다. 세월호 국면에서 ‘대통령께 권합니다’라는 글로 국민과의 공감대가 부족한 대통령은 하야를 해야 마땅하다고 ‘용감무쌍하게’ 말한 시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배 안에 있는 한 우리는 모두 세월호 희생자들의 ‘잠재적 유족’이라며,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직접 쓴 글을 모은 『슬퍼할 권리』라는 에세이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과 관련해 최근까지 북콘서트가 서울, 부산, 충주, 춘천 등에서 열렸으며 시인은 이 책의 판매로 받는 인세 전부를 유족들을 위한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세월호 유족의 슬픔을 다독이다 보니 시인은 이제 유족들과 친분도 쌓였다고 한다.

“유족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당구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저뿐일 걸요? 밥도 안 먹고 삐쩍 말라있는 영오씨에게 ‘이것이라도 하면서 출구를 찾아야 될 거 아니냐’라고 했어요. 진도항에서 같이 밤을 지샐 때 도저히 편히 잘 수가 없었어요. 잠결에도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요. 8월 무더위 속에서 웅웅하는 큰 냉풍기가 돌아가는데도 울음소리는 들려요.”

전 시인은 사회현실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 시인이다. 그는 『슬퍼할 권리』에서 ‘현시대의 침묵이란 겸손이 아니다. 관조나 달관은 더욱 아니다. 이 난장판인 대한민국에서의 침묵이란 비겁함일 뿐이다. 우아한 비겁이다‘라고 쓰고 있다. 세월호 때문에 유명해지지 않았냐는 질문에 “세월호 전에도 이후에도 전혀 유명하지 않아요. 세월호 때문에 유명해진다면 그거야말로 문제예요”라고 말했다.   

 

▲ 현재 시인이자 건설회사 간부이자 국민TV 이사인 전영관 시인은 사진찍는 걸 다소 쑥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그는 “독립영화에서 주연을 해본 적 있는 엄연한 배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 = 이성오 기자

 

건설사 다니면서 국민TV 이사 활동 
전 시인은 지난달 29일 출자금을 낸 조합원들이 협동조합 체제로 운영하는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 이사로 선출됐다. 시인이 2년 전 국민TV에 우연히 출연했다가 한 PD가 아예 방송을 같이 하자고 제의하자 이후 국민라디오에서 ‘전영관의 30분 책읽기’ 등 고정 코너를 맡아 진행하는 등 국민TV와 인연을 가져왔다. 그는 현재 국민TV에서 작가, PD, 섭외 등 다방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인은 문단에 데뷔하기 전인 2006년 한겨레필진네트워크에서 시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문학성이 가미된 칼럼집 ‘부드러운 칼’을 출판하기도 했다.

“원래 제가 조용한 성격이지 결코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에요. 공대 출신에다 늦게 문단에 데뷔했기 때문인지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단 풍토에 잘 섞이지도 않았어요.”

전 시인은 건축학을 전공하고 대형 건설사의 간부사원으로 지냈다. 이상, 함성호 등 공대 출신 시인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시인과 건설사 간부사원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시인이 건설사 현장 소장 시절, 하청업 관계자와 골프를 치며 못 마시는 술이지만 빈번한 술자리를 가졌다.

“실제로 자본주의 생활에 젖어 생활하는 이 생활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스스로 많이 질문했어요. 시인인 나를 인정했다가 또 의심했다가 해요. 그 고민이 굉장히 힘들게 했어요.”

원래 문학에 취미를 붙여 국문과를 전공하고 싶었던 시인은 공대를 가라는 아버지의 강요와 설득에 못 이겨 건축학을 전공했다. 돌을 깨는 할석공으로 일했던 아버지의 눈에는 건설현장을 지휘하는 현장소장이 출세한 사람의 전형으로 보였던지 아들에게 공대를 권했던 것이다. 

“5남매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저는 아버지 말을 저버릴 수 없었어요. 저는 여태껏 시를 배울 기회도 없었어요.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시를 좋아하고 시 쓰기도 했지요.”

전 시인은 2007년 ‘불혹의 집’이라는 시가 토지문학상 대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무려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한 것이다. 그런데 중앙 문단에서는 쳐다보지 않아 4년이 지난 2011년 다시 문단의 문을 두드렸다. ‘작가세계’라는 문학잡지에 시를 발표하며 재등단한 그는 워낙 써놓았던 시가 많았기 때문에 이듬해인 2012년 『바람의 전입신고』라는 첫시집을 펴냈다.

“나와 문장과 세계 일치해야”

전영관 시인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주로 성장기를 보냈다. 고양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85년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다. 현재 일산동구 풍동에 사는 그는 “고양 원당으로 이사올 때 이삿짐 트럭 뒷자리에 앉아서 삼송리부터 원당 입구까지 코스모스가 만발한 길을 달리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라고 회상했다. 낚시를 즐겼던 시인은 강매역 앞 수로 등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고양에 빨리 정이 들었다고 했다.

전 시인은 시에 대해 가지는 일반대중의 허위의식을 혐오한다. 이를테면 시에는 무슨 근사하고 아름다운 것이 들어있는 줄 알고 맹목적으로 시인을 ‘품위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현상을 경계한다. 심지어 시인들조차 이런 허위의식에 젖어 ‘시인’이라는 이름을 훈장을 단 듯 여기며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를 발표하는 이유는 칭찬받고자 하는 7살짜리 아이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현실에서 시인은 생활인일 뿐이에요. 시인이 오히려 더 찌질할 걸요.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인들이 많아요. 본인 혼자 선택한 자발적 가난이라면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시인이 결혼을 했으면 문제가 달라져요. ‘우리 아빠가, 혹은 우리 남편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다니! 우리는 굶어죽어도 좋으니 시를 계속 써’라고 말할 처자식이 누가 있겠어요?”

전 시인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시인, 혹은 글쟁이는 글, 사람, 세계가 일치하는 시인이다. 
“나와 문장과 세계, 글을 쓰는 사람은 이 3개가 거의 같아야 한다고 봐요. 글쓴이와 글쓴이가 쓴 문장, 그리고 그가 내비치는 세계관이 최대한 가까울수록 글쟁이로서의 격이 높다고 보는 거죠. 아름다운 시를 쓰는데 사생활은 엉망진창인 시인들이 참 많아요. 아무리 시적 자아가 따로 있다고 하지만 시와 시인이 일치하지 않으면 사기잖아요.”

전 시인이 좋아하는 시인도 유별나게 이름난 시인이 아니다. 그는 『우리는 읍으로 간다』를 펴낸 이상국 시인, 『황홀한 물살』을 펴낸 강인한 시인을 특히 좋아했다. 전 시인은 이 두 시인을 ‘바위 뒤에 그냥 서 있는 소나무 같은’ 시인이라고 말했다. 한결같이 잔잔한 시풍을 가진 겸손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전 시인은 시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전생에 죄가 많아서 시를 쓴다고도 했다. “마음에 떠오른 그것을 안 쓰면 다른 일을 못할 지경이 되는 거예요. 시를 끙끙대며 쓰다보니 밤에 잠을 못자고 일상이 흐트러지게 되는 거예요. 시인으로 사는 게 참 고달픈 거예요.” 그는 첫시집  2012년 『바람의 전입신고』에서 ‘천지간에 흩어진 죄의 잔재들을 그러모아 / 시를 쓰고 산다… (중략) 새로운 죄를 지으러 / 시만 쓰고 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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