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에 사는 문학작가를 찾아서 11. 시인 유종인

강선마을 17단지에 사는 유종인(47세) 시인은 지금까지 5권의 시집을 펴냈다. 1996년 문예중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20년 동안 쓴 시들은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 『얼굴을 더듬다』로 묶여졌다. 『얼굴을 더듬다』는 첫 번째 시조집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는 고양에 살면서 아마추어 주부 시인들과 함께 자신의 작품으로 합평회를 하는 시인사숙 ‘송빙관(松聘館)’을 운영하고 있다. 만만찮은 분량인 5권의 시집을 펴냈다는 점과 시인사숙을 운영하는 것으로 보아 전업시인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그의 생애에 시는 크게 들어와 있었다. 유 시인이 어떻게 문학과 인연을 맺었는지 물었다.

▲ 유종인 시인은 현대시뿐만 아니라 시조도 쓴다. 미술평론가이자 주부를 대상으로 한 시 선생이기도 하다. 사진 = 이성오 기자

전업시인으로 미술평론 겸해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오래 하셨어요. 중학교 마칠 때까지는 아버지가 계신 학교의 사택 생활을 많이 했어요. 집에 굴러다니던 세로로 활자가 배열된 문고판이나 잡지 등을 접하게 되면서 활자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문학을 하게 된 동기와 관련해 유 시인은 고교시절 겪은 삽화 하나를 기억해냈다. 글쓰기 대회에서 단골로 반을 대표하던 친구가 감기몸살로 결석하게 되자 선생님은 다른 학생을 찾기로 했다. 그 때 숫기 없었던 유 시인이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결과는 교내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고 단골로 반을 대표하던 친구로부터 ‘그러면 그렇지’하는 눈빛을 받아야 했다. 반드시 그 친구의 글 솜씨를 뛰어 넘겠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미래의 시인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고교시절부터 했다고 고백했다.

유 시인은 국문과를 가기를 원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글 하나만은 마음껏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문헌정보학과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 우편배달부나 막노동을 하기도 했지만 뚜렷한 직업이 없이 빈둥거렸다.

대신 유 시인은 신춘문예를 비롯해 상금이 붙은 문예공모에 닥치는 대로 응모했는데, 그 횟수가 백 번을 훨씬 넘긴다. 그는 문학을 해서 돈을 번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상금이 붙은 문예공모에 응모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11년 동안 중풍으로 앓아누운 그의 아버지는 교장을 퇴임한 후 퇴직금을 다 쓰고 돌아가셨기 때문에(유 시인은 “잘 하신 일”이라고 했다) 그의 생활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유 시인은 3번 문단에 등단절차를 거쳤다. 1996년 시로써 문예중앙에, 2002년 시조로써 농민신문에, 2003년 시조로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됐다. 심지어 미술평론 신춘문예에도 당선된 바 있다. 유 시인은 시인으로서는 특이하게도 미술평론에도 관심을 두어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됐다. 미술평론작은 ‘문자도의 서민풍류와 현대회화의 갱신원리’라는 글이었다. 미술평론가가 된 이후 그는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에 미술에세이를 발표하기도 했다.

가족사 다룬 첫시집 가장 애착
“가장 애착이 가는 시집은 저의 첫 시집인 ‘아껴 먹는 슬픔’인 거 같아요. 저의 가족사가 전부 다 들어있거든요. 네 번째 시집인 ‘사랑이라는 재촉들’은 제 마음을 시에 제대로 담았다는 점에서 각별합니다. 그 전에는 그냥 쓰기 위해 쓴 것인데 네 번째 시집부터는 마음을 싣는 법을 터득했다고 할까요.”

유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얼굴을 더듬다』에 나오는 ‘이끼2’라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 ‘그대’는 이끼를 지칭한다. 그늘에 아무도 모르게 번져 있는 이끼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숨어 있는 그늘에서 이끼를 찾아내어 그 안의 또 다른 그늘을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대’를 깨어나게 하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시인은 묻는다. 

그대가 오는 것도 한 그늘이라고 했다 / 그늘 속에 /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 번지는 다솜, /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시 ‘이끼2’ 중에서)

유 시인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소외된 모든 것, 심지어 무생물조차도 사랑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다.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전략’ 밖에 남지 않은 이들에게 그의 이런 말이 그냥 콤플렉스라고 넘겨버릴 수 있다. 더구나 시인은 생활의 곤궁함을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로또복권을 주기적으로 긁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문득 ‘시가 자신에게 왔을 때’의 그 행복감을 스스로 자부하는 듯했다. 유 시인은 그 사소하고 개별적인 행복감을 추구하는 듯 보였다.
 
“느낌은 사소합니다. 그렇지만 그 느낌이 내 것이라고 느끼는 순간 시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시든 낙엽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태풍이 불어서 앳되게 죽은 가는 푸른 잎이 자아내는 아주 사소한 개별적인 저의 느낌이야말로 온전히 제 것입니다.”  

▲ 사진 = 이성오 기자

아내는 5살 연상의 문성해 시인 
유종인 시인의 아내는 5살 연상인 문성해 시인이다. 이윤학 시인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먼 거리를 오가며 사랑을 키웠다. 시흥에 있던 유 시인이 대구에 있던 문 시인을 만나기 위해 “술 취한 채 기차를 타기도 하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비행기를 타고” 가기도 했다.

문성해 시인과 결혼할 때 결혼식 주례는 이성복 시인이, 사회는 손택수 시인이 맡았다. 2000년 대구에서의 결혼식은 떠들썩한 문인들의 잔치였다.

시인부부이기 때문에 가지는 특별함은 없을까. 시인이 낳은 작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진실한 독자가 남편이고 아내일 수 있으리라는 기자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혼 초에는 서로 시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이제는 딴청을 피워요. 신혼 초 섭섭함도 가졌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게 이젠 오히려 편안해졌어요.”

이들 부부 사이에 중학생과 초등학생 딸이 2명 있다. 부부가 시인이기 때문에 문학적 기질을 딸들이 물려받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기질은 물려받지 않고 다만 먹성만 물려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먹성의 건강함을 닮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물질도 소유하는 기쁨도 있지만 거기에 매몰되고 세속화되면 마음에 흠이 가는 것 같아요. 동양적인 관점에서 자족감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죠.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해 좋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죠.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류가 아니더라도, 변방에 있다 하더라도 시를 통해 자족감을 느끼고 존재감을 느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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