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에 사는 문학작가를 찾아서 12. 시인 조정

조정 시인은 고양에서 지금까지 ‘여전사’로 살아왔다. 서울 개포동에서 고양으로 이사온 이후 집 인근에 지어지는 유치원과의 소송분쟁부터 현재의 산황동 골프장 증설 문제까지 그는 늘 싸워왔다. 고양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직을 그만두었지만 지역문제에 여전히 관여할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작가회의 여성인권위원장을 맡으면서 해군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반대해 제주도 남쪽의 서귀포시 서쪽 해안마을인 강정마을에 가서 싸우기도 했다.

이 정도면 시 쓰기를 폐기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늘 싸웠지만 한편으로는 늘 시를 생각하기도 했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제 시인으로 돌아와 인터뷰하자’고 하니 ‘원래 시인이었다’고 했다.

‘시인이 될 거야’ 여긴 10살 소녀    

▲ 지역활동에 바쁜 나머지 조정 시인은 2008년 낸 첫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이후 시집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본업은 ‘시쓰기’임을 인터뷰에서 강조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사택에 살면서 학교가 놀이터였던 조 시인은 초등학교 4학년 어느날, 문득, 홀연히, 그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시인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품었다.

이런 막연한 예감을 또렷한 운명으로 느낀 것은 한 해 후인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소년한국일보가 주관한 백일장에서 덜컥 장원을 차지하면서 가만히 있던 조 시인의 영혼에 문학이 강렬히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조 시인이 처음으로 투고를 해본 것이 1994년경이었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지만 고배를 마셨다. 당시 황동규 시인과 김주연 평론가는 심사평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시인 나름의 터득과 달관의 마음씨는 당선작을 낸 박미란씨의 그것을 앞선다는 느낌을 준다’고 평했다. 그 이후에도 몇 년간 신춘문예 최종심에는 올랐지만 고배를 마시다가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이발소 그림처럼’이라는 시가 당선되면서 조 시인은 등단했다. 그해 조선일보에 투고한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라는 작품에 기대를 너무 건 나머지 한국일보에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국일보에서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알리기 위해 온 전화를 받았을 때도 하마터먼 첫마디로 내뱉을 뻔 했던 말이 ‘한국일보 구독료 내지 않는다’일 정도였다.  

조정 시인은 박용철, 서정주, 이상, 김수영, 황지우, 이성복 시인 등의 시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김지하 시인도 조 시인에게 각별했던 모양이다.  

강의 몸으로 걸으며 숭어들과 속삭여요 할머니, // 앵두꽃 빛깔로 저 아래 용당이 살아나고, 철선이 뜨고, 짐꾼들 숨이 가쁘고, 욕도 간이 맞고, 목도질 소리 놓친 김지하가 죽상어 껍닥 된 낯 벗어 귀신에게 돌려주는 / 거기까지가 영산강이다 / 너는 그립지 않니? (시 ‘하구’ 중에서)

시인의 고향인 전남 영암의 용당과 목포 하당을 잇는 영산강 하구언은 수천 년 이어져 온 환경생태를 내어준 결과물이다. 조 시인은 이곳에 가면 젊은 시절 용당 포구에서 막노동을 하던 김지하가 떠오른다고 했다. 지금의 하구언 생태만큼이나 엉망이 되어버린 그의 노년이 안타깝다고 느낀다고 했다.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에서 검고 거칠고 험상궂은 피부를 ‘죽상어(까치상어) 껍닥(껍데기)’같다고 한다. 

비애는 시 쓰게 하는 힘
조 시인은 문학을 했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렇지만 “문학이 곧 삶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시인의 아버지조차 “너의 시는 어렵다”고 딸에게 말하곤 했다. 물론 이과 전공인 남편도 조 시인의 시가 어렵다고 말한다. 조 시인은 시를 읽는 독자들과의 소통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쉬운 시들이 독자들에게 소통되지만 깊은 미학을 못 느끼고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쉽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한 시가 분명히 있고 이런 시들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쉬운 것으로 끝나버리는 시 또한 있어요. 시인이라면 삶과 사물의 본질에 대해 더 집착을 하고 본질을 이미지로 드러내야 한다고 봅니다. 애초에 경구나 위로를 얻기를 기대한 독자들은 본질을 파고든 시를 읽고 난해하다고 느껴버리는 거죠.”

조 시인은 공부한 만큼 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고 여기고 있었다. 시인들이 삶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모국어를 확장하면서 느끼는 기쁨에 동참할 때까지 독자들은 끈질기게 시에 달라붙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조 시인은 곧바로 의미가 와 닿지 않는 가운데서도 모국어가 이뤄놓은 어떤 이미지를 독자가 마음에 담아낼 때 “시를 씹는 맛”이라고 표현했다.

조 시인에게 시를 계속 쓰게 하는 힘은 삶의 비애라고 했다. 그에게 개인적인 아픔도 비애이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삶의 비애였다. 산황동 골프장 확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후자의 경우다. 그렇지만 산황동 골프장 문제라는 공동체의 아픔을 개인적 아픔으로 포용해내기 때문에 그는 시집 밖으로 뛰쳐나와 행동한다. 

“비애를 해소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그렇지만 시 쓴 후에도 여전히 비애는 남아있고 그 남겨진 비애를 또 없애기 위해 또 시를 쓰고… 끝이 없는 거죠. 비애를 극복하기 위해 시를 쓰지만 시는 늘 무력하죠. 그래도 산황동 골프장 문제로 싸우는 것이 제 본업이 아니라 시 쓰는 게 제 본업입니다.”

▲ "시인이라면 삶과 사물의 본질에 대해 더 집착을 하고 본질을 이미지로 드러내야 한다고 봅니다. 애초에 경구나 위로를 얻기를 기대한 독자들은 본질을 파고든 시를 읽고 난해하다고 느껴버리는 거죠.”

“내 시 보고 페이소스 느꼈으면”
후카, 하늘은 은저울 닦아 바다의 심장을 계량할 뿐이라오 // 염소가죽 텐트 치고 변소를 파고 방석을 깔고 앉았다, 기다렸다, 사철 편서풍 부는 땅이 등에서 떨어질 때를, 뜨거운 금박 모래 한 줌 등에 비벼줄 때를, 모래는 손아귀에서 식어만 가는, 세상에, 도하를 보았다 (시 ‘도하에 홀로’ 중에서).

조정 시인이 지난해 카타르의 수도인 도하에서 열 시간을 경유하며 재래시장과 시가지를 둘러보고, 사막에서 지프 드라이브를 한 후 쓴 시다. 시인은 “제가 사는 곳과 매우 다른, 말 그대로 이국이었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번득이는 곳이었으나 그 땅 역시 별 수 없이 나 살던 곳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풍광으로 사막을 빛낸 인간들의 흔적은 이국적 문양을 지닌 문(門)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000년 고양시로 이사온 조정 시인은 현재 일산동구 정발산동에서 남편과 아들, 그리고 시아버지와 손녀딸과 함께 살고 있다. 올해 96세로 몸이 불편한 아버님 몸을 씻기고 10세인 손녀딸을 탄현에 있는 대안학교에 차로 데려다주는 일도 하루의 중요한 일과다.  

조 시인은 11월 13~15일 전남 장흥에서 열리는 ‘2015 한국문학특구포럼’에 참석한다. 영암·강진·장흥 등 남도의 문학을 조명하는 이 행사에 조 시인은 영암 출신으로 참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시인은 2008년 낸 첫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이후 낼 두 번째 시집을 준비 중이다. 조 시인은 “시는 늘 써왔으니까 한 권의 시집으로 묶을 수 있는 분량은 가지고 있는데 아직 출판사가 정해지지 않았어요. 출판사에 따라 언제 시집이 나오는 게 정해져요. 지금 바로 출판사에 원고를 준다해도 늦게는 2년 후에 출판되는 경우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조정 시인은 행간의 여백이 많지만 참 많은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떠오르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독자들이 내 시를 읽은 후 그 시를 잊고 있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을 내다보는 어느 순간 내 시의 한 구절이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니였을까라고 그냥 생각해주었으면 해요. 마치 유리창 한편 깨진 부분에 햇빛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제 시가 독자들을 건드렸으면 해요. 독자들이 한순간 제 시를 떠올리고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다면 만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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