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  글 박형진· 사진 황헌만 / 열화당 

갈퀴, 호미, 괭이. 누구나 아는 이름, 농사 지을 때 쓰는 연장이다. 풍구, 써레, 고무래. 이 역시 농촌에서 사용했던 연장이름인건 알겠는데 정확한 모양과 용도는 알 듯 말 듯 하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세기갓통, 주루막, 무자위, 멱둥구미...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다. 이것들도 엄연히 불과 한 두 세대 전에 우리네 농촌의 일상에서 당당히 한 몫을 담당하며 사용되었던 연장, 또는 물건들이다. 익숙한 것도 있고 생소한 것도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 모든 물건들을 한 때는 하나하나 농부의 손으로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대장간에서 만들어 온 보습들 역시 주인의 손에 맞게 다듬어 쓰고, 날이 무뎌지면 벼려 쓰고, 어딘가 망가지면 잇대거나 고쳐 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연장을 만들고 쓰고 갈무리하는 일 자체가 바로 삶의 모든 것이었던 시절은 그리 오래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 창고의 문을 열다

최근 열화당에서 선보인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는 이야기』는 점차 사라져가는 전통 연장들에 대한 기억을 붙드는 책이다. 글을 쓴 박형진 시인은 전라북도 변산의 모항마을에서 태어나 지금도 손수 농사를 지으며 고향땅에서 살고 있다. 그는 농사꾼의 몸에 각인된 감각에 시인의 감수성을 보태 기억의 창고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연장들을 하나씩 호출한다. 70~90년대 농촌지역의 풍광을 담은 황헌만 작가의 흑백사진도 기억의 구체화에 일조한다. 유년의 뿌리를 농촌에 두고 있는 세대들에게는 아주 오래 전에 헤어진 혈육의 빛바랜 사진을 우연히 발견한 것과 비슷한 반가움이 밀려올 수 있겠다. 농촌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지난 세대가 살아온 삶의 터전과 생활공간을 섬세하고 생동감있게 재연해내는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속도를 늦추어야 보이는 재미

알찬 종자를 파종해 실팍하게 책농사 잘 짓기로 유명한 열화당에서 만든 책이니만큼 내용이나 만듦새야 의심할 나위 없지만,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도 재미다. 이 책은 다양한 차원의 재미를 가득 품고 있다. 물론 그 재미가 생각과 감상의 속도를 늦추면 늦출수록 배가되는 조금은 독특한 종류의 재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선 책을 통해 소개되는 연장들의 다양한 면면들이 그 자체로 무척 흥미롭다. 책을 통해 소개되는 연장의 종류는 90여 개에 가깝다. 각각의 연장들을 만드는 재료와 만드는 법은 물론, 용도와 사용방법, 보관방법에 이르기까지 꼼꼼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연장이라도 글쓴이의 애정 어린 설명을 따라 그 모양과 질감과 쓰임새를 상상하다보면 연장들은 어느 새 형상을 입고 읽는 이의 눈앞에 놓여지고, 손의 촉감에 만져진다.

연장, 삶과 노동의 지문

하지만 연장 자체보다 더 구체성의 옷을 입는 것은 바로 그 연장을 만들고 다루는 농부의 삶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연장은 신체의 연장(延長)이고, 삶과 노동의 지문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연장이라 칭해진 호미를 설명하며 어머니와 누이의 땀과 눈물방울을 이야기하고, 거름통을 설명하며 농부가 거름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실감나게 설명한다. 이렇듯 연장과 노동의 짝지와 궁합, 연장을 사용하는 농부의 기쁨과 고단함을 시정 넘치는 문장으로 아름답게 묘사한다. 은근한 해학도 읽는 맛을 더한다. 살림 알뜰한 남정네라면 화가 나도 둥구미(깨질 염려가 없는 짚으로 엮은 그릇)를 찾아 던졌다는 증언이나, 알을 낳은 암탉 앞에 바람둥이 남편이 지렁이를 잡아놓고 자랑스러워하더란 문장은 읽는이의 입가에 순박한 미소가 걸리게 한다.

활자 속에 담아 낸 농경사회 소멸사

이 책에서 다뤄진 몇몇 연장들은 시대와 사회를 단적으로 응축한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살포라는 연장은 유일하게 땀 안 흘리는 일꾼, 논에 들어갈 일 없는 농부를 위한 연장이다. 바로 마름이 지팡이 삼아, 신분을 드러내는 장신구 삼아 들고 다니는 논둑 물꼬삽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비녀처럼 날렵하고 아름다운 살포가 소작인들에게는 꺾어버리고 싶기도 했을 마뜩잖은 물건이었으리라 말한다. 연장 하나를 통해 전통사회의 모순적이고 서글픈 신분구조를 단박에 설명해주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전통 농기구로 알고 지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 이후에, 다시 말해 일제 강점기에 유입된 것들이란 사실도 알게 된다. 우리의 전통적인 곡식 포장재인 섬을 대체한, 편리하고 유용한 가마니가 일제에 의한 쌀 공출의 일등공신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가마니와 함께 족탈식 탈곡기 등 근대적 연장 유입의 이면에는 농업증산이 식량수탈을 동반하며 진행된 이 땅 농촌의 가슴 아픈 역사가 오롯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 책에는 농사의 시기와 절차, 세시풍속, 자연의 변화, 더불어 공존했던 가축과 뭇 생명들에 대한 이야기도 더해지고, 노동요와 속담, 주술과 민간처방 등의 이야기도 적잖이 등장한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연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통 농경사회가 근대를 통과하며 어떤 모습과 까닭으로 소멸해갔는지를 총체적으로 설명한 독특한 역사책이자, 활자속에 담아 낸 농경사회의 생활사 박물관이다.

우리가 떠나 온 아름다운 세계
글쓴이의 눈빛은 종종 전통적 농경사회의 삶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으로 빛난다. “연장을 손에 잡고 쓸 때 손이 경험하는 느낌과 만드는 과정의 몰입은 인간의 진화를 가져온 가장 자연스럽고도 행복한 모습”이라거나 “하찮은 연장 하나에도 제 모습을 갖춰 태어나는데는 산과 들과 햇빛과 물과 바람, 그리고 오랜 시간과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숙련된 정성이 필요하다”와 같은 문장이 그 증거다. 하지만 동시에 근원적인 슬픔과 허망함도 숨기지 못한다. 그는 벼훑기를 설명하는 꼭지에서 때가 되면 어김없이 베어져 낱알이 털려져야 하는 곡식의 운명을 모든 존재의 숙명으로 확장한다. “곡식을 거두는 것은 기쁨이면서,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서글픔이기도 하다···(중략)···근원적이고 덧없는 것이다···(중략)···저와 내가 다르지 않아서 우리의 한 생애가 무한 우주 속에 찰나로 흘러간다.” 우리의 기억도 그렇지 않던가. 수천년을 이어오던 농경사회의 삶 역시 찰나의 기억처럼 흩어져간다. 그 흩어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이 책은 잠시나마 붙든다. 스스로의 노동에 근거하는 존엄한 자급자족의 삶, 총체와 개체가 서로 기대어 존재하는 순환적인 삶, 무엇 하나 버리지 않는 완전 소모의 삶. 그 아름다운 세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 사진제공 : 열화당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