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호 고양역사문화연구소장
민순(1519∼1591)은 조선 중기 유학자로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 습정(習靜)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어려서 낙봉 신광한에게 글을 익힌 뒤,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1년 극진한 효행으로 효릉참봉에 천거된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처사(處士)의 삶을 살았다. 말년에 고향 행주에 머물며 후학양성에 전념하였고, 사후에는 고양팔현의 일원으로, 고양의 문봉서원과 개성의 화곡서원에 제향 되었다.

 

행촌은 어려서부터 몹시 가난하여 나뭇잎에 글씨를 쓰곤 하였다. 그 연습한 분량이 워낙 많아 봄에 눈이 녹을 때나, 여름 장마철이 되면 마을의 골목이나, 인근 개울이 검게 물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선생이 살았던 행주리(幸州里) 주변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거무내’ 혹은 ‘먹골’, 현천(玄川) 등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선생께서 어린 시절 낚시하고 물놀이하던 인근 한강 행호(幸湖:행주나루) 주변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창릉천이 휘감아 도는 덕양산 절벽 밑 풍광 좋은 곳에는 예로부터 한양 고관대작들의 별서(別墅·별장)들이 즐비하였고, 그 아래로는 고기 잡는 어부들의 노랫가락이 사계절 끊이지 않는 이른바 풍요와 궁핍함이 공존하는 곳이 행주였다.
 
행주의 옛 지명은 개백현(皆伯縣)이었으나, 고려시대에는 행행(行幸:왕이 행차함)한 곳이라는 뜻의 행주(幸州)로, 그리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행주(幸州)와 행주(杏洲)를 함께 쓰게 되었다. 이때의 행(杏)은 당시 이곳에 살구나무가 많아서였는지 아니면, 조선에 들어와 유교가 국시로 되면서, 공자가 행단수(杏壇樹) 밑에서 제자들과 음악을 즐겼다는 고사에서 차용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행호(幸湖) 혹은 행호(杏湖)는 행주나루 주변 강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서해의 많은 고기떼가 몰려드는 곳이다. 특히 음력 3, 4월에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황복(河豚)과 은빛 찬란한 웅어가 장관을 이룬다.

행주의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고 살아온 선생으로서는 스스로의 호를 행촌(杏村)으로 지을 만큼 행주에 대한 남다른 애증(愛憎)을 품고 살아야 했다. 1575년 선생이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마침 인순왕후의 국상을 당하였다. 이때 선생은 예관들의 상복을 보고 “3년 상(喪)은 천자로부터 서민에까지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는 그간 선생이 평생 가슴에 새겨온 평등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행히 상소는 채택이 되었지만 선생 자신은 향리로 돌아와 초야에 묻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관직이 제수되었지만 자신의 도(道)를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번번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행촌의 사후 그의 제자 홍가신(洪可臣)은 선생의 묘갈 문에서 ‘경학(經學)에 밝고 가업(家業)은 항상 쓸쓸하였으나, 의(義)를 위해서는 광풍(狂風)처럼 나섰다’라고 적었다. 또한 ‘수우당 최영경(崔永慶) 공은 평생 남을 인정함이 적었으나 오직 선생에 대해서만은 깊이 공경하고 사모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최영경은 대곡 성운(成運), 민순(閔純) 등의 문우(文友)이자 초야의 명유(名儒)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이는 생전의 행촌이 얼마나 스스로의 탁행(卓行)에 엄격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선생은 73세를 일기로 행주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자택에서 백보 떨어진 고양시 현천동 거무내 마을 뒷동산에 마련된 묘소에는 배(配) 숙인 평양 조씨, 숙인 전주 이씨와 함께 3기(基)의 봉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앞에는 습정선생 민공묘갈명(習靜先生閔公墓碣銘)이라 세긴 비석과 묘표가 오랜 세월 풍상에 씻기고 깎긴 체 오가는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저서로는 행촌집(杏村集)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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