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수 소설가
폭염을 피해 1박2일 두타산으로 여행을 다녀온 직후 킨텍스 사측이 노동자들의 밥줄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공적 성격이 강한 기업이 노동자들의 삶을 벼랑으로 내몰고, 항의하는 해고자들에게 ‘별거지 같은 것들’이란 모욕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소식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더위를 피하러 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다.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달려 나가야 하는 생존전쟁은 도대체 언제쯤 끝이 날까.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질 않아 먹먹하다. 노동은 있되 노동자는 존재하지 않는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는 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길을 찾아야만 한다.

십 년 가까이 텃밭농사를 짓고 도시농업운동을 해오면서 나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 작은 균열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세상이 서서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텃밭을 일구다보면 당연시 해왔던 것들에 회의가 들면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게 가능해진다.

텃밭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나는 노동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노동은 본래부터 개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란 사실을. 그래서 노동은 거룩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그리곤 근원적 질문이 뒤따랐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노동은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울까. 정성껏 돌본 작물을 수확해서 맛보았을 때도 근원적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동안 도대체 뭘 먹고 살았던 것일까. 독극물이나 다름없는 음식을 왜 아무런 의심 없이 먹어온 것일까. 손수 흙을 일구다보니 풍경을 바라보듯 무심코 지나쳤던 농민들의 삶이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면서 우리의 일상이 수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자각이 송곳으로 살을 후벼 파듯 아프게 다가왔다. 아, 우리는 각자의 노동도 빼앗기기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남의 노동을 빼앗아서 생활하고 있구나.

일상 공간에서 좀처럼 던지기 힘든 질문들이 텃밭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까닭은 구체적 관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계층과 직종에 상관없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프게 살아가는지가 피부에 와 닿는다. 노동을 통해 노동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근원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다. 근원적 질문이 이어지기 시작하면 분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한 평이든 열 평이든 서로 어울려서 텃밭을 일구는 소망이 날로 절실해진다. 혼자서 텃밭을 일구면 아파트 생활의 연장선에 놓이기 십상이다. 느슨한 형태이든 끈끈한 형태이든 공동체로 어울리는 게 좋다. 그래야 질문의 진폭이 커진다.

그렇게 질문하는 삶이 일상이 되다보면 킨텍스에서 노동자들의 밥줄을 끊었을 때 지금 뭐하는 거냐고,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고 일제히 분노하는 게 가능해질 것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구체적 질문을 통해 몸으로 깨닫는다면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땐 아마도 이런 질문이 일상이 되지 않을까.

“혼자만 잘 살믄 무신 재민겨?”

 * 고 전우익 선생의 에세이집 제목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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