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이루는 사람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초청 강의 마련

고양시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시민단체인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이사장 윤주한)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초청강의 시간을 마련했다.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의 산하 고양평화통일시민학교(학교장 백장현)가 26일 마련한 이번 강의는 제7기 회원들을 위한 강의로 이날 20여 명의 회원들이 한 교수의 강의를 경청했다. 한홍구 교수는  미국 워싱턴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독립투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대표적 진보 역사학자로 현재 평화박물관 추진위원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한 교수의 강의에 이어 30일에는 파주시에 위치한 민족화해센터에서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과 백장현 고양평화통일시민학교장의 강의가 펼쳐졌다. 26일 진행된 한홍구 교수의 강의내용을 요약한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26일 고양교육청을 방문해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 회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축복인 동시에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통치 36년보다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분단의 고통 속에서 전쟁을 겪고 준전시상태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단의 원인을 민족 내부의 좌우대립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2차대전 이후 출현한 숱한 독립국가들이 모두 내부의 좌우대립을 겪었지만 그 결과가 분단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적어도 식민지시기의 좌우관계는 대립의 측면도 있었지만, 협력의 측면이 더욱 강했기 때문이다.

해방전야의 주요한 독립 세력은 크게 네 부류로 볼 수 있다. 중국 중칭의 임시정부, 예난의 독립동맹, 소련령으로 퇴각해 있던 만주의 항일유격대원들, 그리고 국내의 건국동맹을 들 수 있다. 이들 세력 상호간의 합작은 여러 가지 제약요인과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세력들은 모두 좌우 이념을 떠나 반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표용하려는 민족통일전선을 표방하고 있었다. 또 이들이 각각 내세운 정치강령, 즉 해방 후에 수립할 민족국가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민족국가의 청사진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임시정부의 경우, 다른 집단들과는 달리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강령’에서 토지와 주요 생산기관의 국유화를 천명하는 등 자본주의 경제체제보다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보다 충실하고 있다.

식민지시기 또는 해방 직후에 새 국가의 경제제도로 사회주의를 선호했던 것은 일반 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반시민들의 선호도는 자본주의 14%(1189명), 사회주의 70%(6037명), 공산주의 7%(574명), 모른다 8%(653명)으로 좌익이념에 대한 선호도가 무려 77%에 달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해 버린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같은 여론 조사 결과는 우리를 침략한 제국주의는 바로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이기 때문에 민족해방운동가들이나 대중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유사한 것으로 인식한 측면이 반영됐다. 더구나 식민지 상태를 막 벗어난 조선에는 자본주의 제도나 이념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줄 만한, 도덕적으로 상처받지 않은 인물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분명 민족주의자들이나 우익세력에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독자적인 집권을 이룰 만한 능력이 없었다. 실상 남한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출현을 저지한 가장 큰 요인은 미군정의 압도적인 물리력이었다. 이 당시 좌익은 우익을 압도할 힘을 지녔을 지 모르지만, 미국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꺾을 힘은 갖지 못했던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전쟁은 이북에 의해 전면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으로 단순화한 이북 공산주의자들의 논리가 치명적인 결함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모든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리는 것 역시 전쟁의 복합적 원인과 복잡한 성격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이남에는 철저한 반공사회가, 이북에는 김일성유일사상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가 확립됐다. 남북은 ‘적대적 공생관계’라 불릴 정도로 상대방의 존재 또는 위협으로부터 자기체제의 정당성을 끌어내는 데 각각 전력투구했다.

전쟁기간 동안 목격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이남 주민들의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증폭시켰다. 우리 이남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면, 이북 사람들의 체험은 ‘미제의 각을 뜨자’는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을 가져왔다. 이남에서 사회주의가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없었던 것 이상으로 이북에서는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가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다. 이남 사회가 급속한 산업화를 겪는 동안,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사회 내부의 비판자, 교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무제하의 안보논리를 강화시켜 주는 외부의 위협으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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