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국가나 하는 국정교과서, 국격의 문제

 

▲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제52회 고양포럼 -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강연

 

독재국가나 하는 국정교과서, 국격의 문제
유신 때도 했던 집필자 공개, 지금은…

[고양신문] 52회 고양포럼은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강사로 초청했다. 지난 21일 일산동구청 강당에서 ‘국정교과서 문제와 건국절 논쟁’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강연회는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건국절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강사로 초청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국사학회 회장을 지낸 대표적인 역사학자다. 이날 강연내용을 정리한다.


건국절 논란의 시작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올해를 건국 60주년으로 하겠다’라는 발표를 하면서 시작됐다. 8월 15일 ‘광복절’이란 국경일을 없애고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 회원들이 훈장까지 반납하며 거세게 반발하자 결국 무산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국정교과서 등을 동원해 이를 다시 추진하려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8·15경축사에서 건국 68주년이라고 언급했다. 대한민국의 시작이 1919년이 아니라 1948년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지 대한민국 ‘건국일’이 아니다. 여기에 대한 시각 차이는 대한민국 건국을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보는지, 혹은 식민지근대화론의 관점에서 볼 것인지에 대한 차이에서 온다. 여기에 하나 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적 전통을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분단의식을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1948년이 대한민국이 ‘건국된 해’가 아니고 ‘정부가 수립된 해’라는 근거를 살펴보자.

우익 성향의 이승만 대통령마저 1948년 제정한 제헌헌법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당시 이승만의 요청으로 헌법 전문이 쓰이게 됐는데 거기(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이라고 쓰여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국가를 이제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다.

제헌헌법은 1919년을 건국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5차 개헌에서는 ‘3·1운동으로 인한 임시정부 법통’이 전문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현행 헌법인 9차 헌법(1987년 개정)에서는 다시 1919년 임시정부 법통을 재확인하고 있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을 계승하고’라고 명시돼 있다.

1948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해 8월 15일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이라고 쓰인 대형 플래카드를 행사에 사용했다. 건국일이 아닌 정부수립일로 보고 있는 것. 또한 그해 9월 1일 정부가 발행한 관보 1호에서는 발행일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했다.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사실을 밝힌 것. 이승만과 국무위원의 공문서에도 서명일자에는 ‘대한민국 30년 0월 0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 제52회 고양포럼은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를 초청했다.


그렇다면 보수정권과 뉴라이트 세력들이 1948년을 건국절로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1948년을 건국절로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 된 것일까?

 

교육부 장관을 지낸 황우여는 2008년 한나라당 의원 시절 ‘건국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이후 폐기된 이 법안의 핵심내용은 ‘1945년 해방부터 1948년 정부수립까지 3년간 정부를 세우는 데 공이 있는 자를 건국공로자로 보고 포상하자’는 것이다. 포상 대상자에는 반공세력이라고 하지만, 과거 친일활동에 종사했던 인물로 해방 후 과거를 숨기기 위해 반공활동에 종사한 이들이 매우 많다. 다시 말해 뉴라이트 입장에서 1948년을 건국절로 하는 것은 ‘친일세력과 반공세력에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일방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인데, 그들은 늙었으며 무엇보다 힘이 없는 계층으로 전락했다. 이미 친일세력이 반공세력과 결탁해 대한민국을 집어삼키지 않았나.

대한민국 건국을 1948년이 아닌 1919년으로, 즉 일제강점기 시대로 했을 때 그들이 가지게 될 부담은 무엇일까. 그들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1948년에 건국되어야지만 친일 부역자들에게 언젠가 내려질 단죄의 근거가 약해질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친일행적은 건국 이전의 일이 되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기 한결 쉽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 이것은 단순한 반공문제, 좌우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나라의 기득권층인 친일세력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그들에게 건국의 주체는 반공세력이어야 합당하지 독립운동세력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역사학적으로도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4월이고, 대한민국정부수립은 1948년 8월로 보고 있다. 현재 공개를 앞두고 있는 국정 역사교과서는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있으며 그 의도가 불순하다. 박정희 때 교과서를 국정화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적어도 집필자의 이름은 공개했었다. 유신 때도 했던 집필자 공개를 지금은 안 하고 있다. 공산국가에서나 하는 국정교과서는 국격의 문제이기도 하다. 새누리당의 김무성은 역사학계의 90%가 좌편향 됐으며, 황교안은 학생들의 99%가 좌편향 된 교과서로 공부한다고 역사학자들을 공격했다. 지금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지금까지의 역사 교과서가 대부분 좌편향이라고 생각하는지,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유신시절에나 사용했던 국정 교과서로 공부를 시킬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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