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피엔스 축제’ 대상에 권덕은씨 ‘자연의 소리’ 선정

인문학모임 귀가쫑긋에서 주최한 ‘나도 사피엔스 축제’가 참가자 모두에게 의미 있는 추억을 남기며 마무리됐다. 독자에게 풍성한 영감과 도전을 던져주는 한 권의 책(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시작된 ‘사피엔스 축제’는 지역의 인문학 동아리가 주최한 행사로는 규모와 내용 면에서 차별화된 시도를 보여줬다. 원작의 무게감에 부담을 느낀 탓인지 응모편수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응모작들은 개성 있는 시각으로 사피엔스가 던져 준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응답을 담아 내 심사위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심사 결과 ‘자연의 소리’라는  산문을 쓴 권덕은씨가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당선작과 함께 권정우 심사위원장의 심사평, 행사를 후원한 김혜성 원장의 글을 싣는다.  

■ 나도 사피엔스 축제 결과
접수기간 : 2016년 9월~10월
응모편수 : 총 38편
심사위원 : 권정우(충북대 국문과교수), 임영근(귀가쫑긋 회장), 김경윤(인문학자)

심사결과
대상 권덕은 ‘자연의 소리’
1등 장유경(문학부문), 홍유경(비문학부문)
2등 김미희(문학부문), 이계숙·이강산(비문학부문) 이윤미(기타부문)
3등 김미숙·강정아(문학부문), 오종홍·전해성(비문학부문), 송호준(기타부문)
※ 예선 통과자 전원에게 김영사 책 1권 전달 

■ 심사평 (요약)

끝나지 않는 축제

『사피엔스』에는 ‘당연한 듯 보이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필자의 시선이 있다. 누구라도 필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다.
좋은 글은 ‘좋은 글이라고 보기 어려운 글’과 많이 다르다. 좋은 글에는 설명이 없다. 설명하면 지루하다. 좋은 글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글을 잘 써야겠다는 집착을 떨치지 않으면 고통스럽게 글을 쓰게 된다. 좋은 글에는 좋은 주제가 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았다면 좋은 주제가 들어있는 글이 나오기 어렵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책 한 권만 읽고 쓰지 않는다. 『사피엔스』를 읽는 것은 기본이고 관련이 있는 책, 예술작품, 더 나아가 직접 체험을 활용한다. 좋은 글에는 내 생각과 감정과 해석이 담겨있다. 생각이 논리적일수록, 감정이 섬세하고 따뜻할수록, 해석이 깊거나 높을수록 더 좋은 글이 될 것이다. 좋은 글에는 직접 체험이 많이 들어 있다. 초일류 작가가 아니라면 상상보다 체험한 것 중심으로 글을 쓰는 게 좋다.
좋은 비평문은 감탄을 자아내고 좋은 문학작품은 독자를 감동시킨다. 권덕은씨의 글이 대상 작품으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다. 시상식을 끝으로 귀가쫑긋에서 주관한 사피엔스 축제는 마감을 하지만 책을 읽고 영감을 얻어서 글을 쓰거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보는 ‘혼자서 하는 축제’는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 행사 후원자의 글

한 권의 책으로 시작한 행복한 축제 

『사피엔스』 책을 접한 지 1년도 넘었지만, 저에게 그 책의 느낌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요즘에는 스스로를 ‘사피엔스 수컷’으로 보면서, 여러 행동과 욕망의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90살쯤 되어서 ‘내 인생의 책’을 회상할 즈음엔 이 책을 가장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이 책의 시선이 참 좋아 사피엔스 축제를 제안했지만, 막상 진행되는 와중에 운영진의 마음씀이 너무 큰듯하여 괜한 일을 벌였나 싶기도 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좋은 작품들을 내 주셔서 마음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행사의 진행을 위해 특히 애써준 임영근 회장님과 장유경 총무님께 감사를 전한다.
수상작으로 선정되신 분들, 모두모두 축하드린다. 낯익은 이도 있고 처음 접하는 이름도 있지만, 모두가 이 과정을 즐기고 배우고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권정우 교수님이 심사평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사피엔스 축제는 끝났지만 좋은 글을 읽고 영감을 얻고 글을 써보는 ‘혼자서 하는 축제’가 귀가쫑긋 식구들과 우리 이웃들 사이에서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 당선작

자연의 소리

권덕은 (대상 수상자)

텃밭은 집에서 학교로 출근하는 길목에 있다. 지난날의 게으름을 애써 떠올리며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하는 욕심을 꾹 누르고 올해는 다섯 평만 분양받기로 했다.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어 준다는 주인의 말에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퇴비를 섞으러 간 날 밭을 살펴보니 이곳은 돌밭이 아닌가? 결국 나는 삽질이 생략된 대신 쭈그리고 앉아 사흘 동안 돌을 골라내야만 했고, 농장에 구비된 쟁기나 삽이 보이지 않아서 딸랑 호미 하나로 일곱 개의 이랑을 만들어야 했다.
상추씨를 뿌리고 감자를 심던 날, 열다섯 평을 분양받은 마음씨 좋은 부부가 강낭콩과 완두콩을 나누어 주셨다. 콩과 더불어 올해의 도전 작물은 허브다. 식물이 자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봄날의 텃밭은 정갈하고 고요해보이지만 내 귀에는 무척 소란스럽게 들린다. 따스한 볕에 나른한 등을 맡기고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그 소리에 빠져들다 보면 자라는 작물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며 풀풀 풍겨내는 흙냄새까지 내 코를 간지럽힌다.
 비록 50주나 심었던 초석잠은 여름 가뭄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성근 배추와 무를 수확해 김장과 깍두기를 담는 것으로 마무리한 작년 농사는 성공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대도시에서 쭉 자란 나는 시골에 인척마저 없어 어린 날 농사짓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잠시라도 몸으로 익혀 본 경험이 없다. 책을 보며 나의 힘만 믿고 짓는 무식한 농사를 증명이나 하듯 작년에는 열 평을 분양받아 혼자 삽질하여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만들었다. 일찌감치 내가 다닐 고랑에 검정 부직포를 깐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멀칭을 하지 않은 이랑에는 마음껏 씨를 뿌리고 신나게 수확하고, 그리고 신이 나서 사람들과 수확물을 나누었다. 비록 주인아저씨의 땅이 예상보다 빨리 건설회사에 팔리는 바람에 8월부터는 허리만큼 자란 풀을 가위로 잘라 길을 내고 몰래 숨어들어 작물을 심는 스릴 넘치는 도둑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무사히 배추와 무를 수확했으니 어찌 성공의 환희에 들뜨지 않을 수 있었을까?
수고한 텃밭에 인사를 하던 마지막 날이 생각난다. 단풍이 예쁘지 들지 못할 정도로 메말랐던 여름이 지나고 내린 몇 번의 가을비로 흙은 아주 보드랍고 포슬포슬했다. 폭폭 꺼지는 두둑의 촉감도, 할 일을 마친 채 서 있는 깻대와 가지 줄기도, 꽃대 맺은 상추도, 다시 흙으로 돌아가려고 드러눕기 시작한 금빛 풀까지 모두 이 땅에서의 마지막 모습일 것 같아 담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눈에 담으며 나는 오랫동안 흙을 밟아 주었다. 그 날의 풍경과 감촉은 아직도 눈과 발에 훤한데, 지금 이 땅은 민낯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화장을 한 듯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채 무거운 자동차에 짓눌려 있다.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내 시선은 자연히 내가 경작했던 위치로 가고, 이내 내가 갇혀버린 듯 내 숨은 탁 막힌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급과 업무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고 4월부턴 농사일에 집중해야 하니 베란다 정원의 정비는 2월말까지 마무리를 한다. 겨울 끝을 알리는 낯선 바람이 코끝을 스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이성을 잃는다. 가슴이 울렁거릴 때마다 식물을 사다 심는데, 새해가 되자 대대적인 분갈이를 했다. 9년 동안 흙을 갈아준 적 없는 파키라도 끄집어냈다. 줄기를 모두 잘라내고 눈 딱 감고 얼마 되지 않는 뿌리마저 잘라내 버렸다. 몇 년 동안 빨간 벌레의 서식처였기에 계속 해충이 번지는 것이 지겨워져 나는 이 녀석을 처단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떻게 버려야 할지 몰라 일단 베란다 벽에 기대어 두었다. 덕분에 나의 베란다 정원은 봄철 내내 봄빛 마를 날 없이 새로운 잎과 새로운 꽃들로 가득했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준다는데,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집밖으로 잘 나올 수 없었던 시절, 내가 기댈 수 있었고 나를 치유해 준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식물들이었다.
아름다운 정원, 싱그러운 텃밭과 더불어 올해 봄날 내 마음이 풍요로웠던 이유는 새로 옮긴 근무지 덕분이었다. 학교는 습지 쪽으로 쪽문이 나있다. 쪽문 너머로 연둣빛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나는 매주 월요일 영어전담 선생에게 아이들을 보내고 쪽문을 벗어나 습지로 산책을 나왔다. 아파트 단지로 개발하려던 습지는 환경단체의 끈질긴 노력으로 무사히 보존된 곳이다. 10년 전에 연둣빛과 꽃빛으로 내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면 올해는 내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잘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귀를 파고 들어와 가슴을 데웠기 때문인데 고봉산과 습지에서 나는 새소리는 문을 열어 놓으면 교실까지도 들렸고, 교정에도 다녀가는 듯 아주 가깝게 들리기도 했다. 공부시간에 새소리가 들리면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을 부추겨 나는 아이들과 함께 새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곤 했다.
빈 교실에서 플롯 연습을 할 때 새가 울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연습을 멈추고 새소리를 들으며 새의 리듬을 파악해보려 애쓴다. 그런 다음 그 리듬에 맞춰 조용히 내 플롯 가락을 얹어본다. 새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소리 나쁜 새가 왔나 잔뜩 경계를 했을 테지만, 나는 새와 내가 듀엣 연주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히죽 웃음이 났다. 습지를 산책하다가 새 관찰학습원도 발견했다. 아마도 헬렌 켈러의‘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산문집을 읽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감각이 막힌 헬렌 켈러가 일반인보다도 더 깊이 있게 숲속의 자연을 느끼는 것처럼 나도 새소리를 느껴보고 싶었다. 가장 편해 보이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서서 두 팔을 벌렸다. 소리를 받아낼 듯이 손바닥을 펴고 마지막으로 모든 감각이 귀로 집중되도록 눈을 감았다. 아! 도대체 몇 마리의 새가 노래하는 것일까? 눈을 떠 학습원에 펼쳐진 나무 사이를 살폈다. 새는 한 마리도 내 눈에 보이지 않는데, 환상적인 오케스트라 연주가 펼쳐지는 공간이 근무지에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본격적으로 식물을 가꾼 지 10년, 주말농장 6년차. 봄날, 이제 나는 생명을 잘 이해하고 생명을 잘 다루고, 그리고 자연을 잘 느낄 줄 아는 자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10년 동안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였으니 자연인은 내가 얻어야할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건사하고, 운동을 하고 강의를 듣고 악기를 배우다보니 생각보다 텃밭에 나가 일할 짬이 나지 않았다. 수확하고, 유인줄을 묶고, 약을 치고, 김매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갔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차려야 했다. 결국 부직포를 고랑에 깔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5월 초에 교실 천장의 선풍기를 떼어내 씻어 가동할 만큼 더위는 내게 빠르게 다가왔고, 갱년기를 겪을 나이도 아닌데 뚱뚱한 몸의 온도 조절 센서는 오래전에 망가져 6월에 들어서면서 부쩍 기운을 잃기 시작했다. 나의 왼쪽 밭 할머니는 5월에 이사를 가신 후 보이지 않고, 나의 오른쪽 밭 아저씨는 많이 아프시다더니 계속 나오지 못하여 케일이 배추만큼 자라도, 맺힌 호박이 썩어도 수확하는 기색이 없다. 양쪽 밭의 관리가 멈추자 나는 경계 고랑과 내 밭으로 넘어오는 작물까지 손을 봐야 했다. 더위로 인해 무기력증에 걸린 나는 어쩌다 한번 큰마음 먹고 나가도 무섭게 자란 잡초와 전쟁만 하다 돌아왔다. 그러다보니 완두콩도, 옥수수도 모두 새들의 잔칫상이 되어버렸다.
그 여느 때보다 길고 더웠던 여름 속에서 하루 동안 더위를 견디는 것 외에 달리 내가 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선풍기 한대에 의지하며 집안에 드러누워 가까스로 숨만 쉬고 있노라면  앞으로 여름을 견딘다는 것은 내게 몹시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야생화들은 본인 몸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주인 탓에 근근이 목숨을 이어오다 8월 중순 무렵 아들이 입원한 사건을 틈타 속수무책으로 말라 죽었다. 애지중지하던 동백 채향도 죽었고, 7년간 짱짱하게 번식한 사계 꿩의 다리도, 2000원에 사와 10년간 분신 같이 생각하고 키우던 나의 율마도 죽어버렸다. 그 어느 해보다 화려했던 정원이 한 순간 폭격을 맞는 도시처럼 절망스런 폐허로 변해 버렸다. 8월 말에도 꺾일 줄 모르는 더위에 나는 더 이상 밭에도 나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을 농사를 포기해버려 작년 농사의 성공마저 빛을 잃게 만들었다.
날씨에 굴복한 후 내가 포기한 것은 결국 머리를 쓰는 일이 아니라 몸을 쓰는 노동이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공부도, 운동도, 음악도 아닌 생명을 포기했다. 마음이 너무나 힘들 때,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자연은 정작 내 몸이 힘들고 귀찮아진 순간 내가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자 봄날을 만끽한 자연인으로서의 내 모습이 모두 가식처럼 느껴졌다. 나의 잔인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 감정을 대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마음과는 반대로 생활은 아주 수월해졌는데, 더위가 수그러들면서 점점 내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직장 생활과 집안일과 배움까지 소화가 되어 마치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 같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은 좀처럼 봄날과 같은 풍요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텃밭에 나가지도 않고, 반쯤 폐허가 된 정원마저 외면하니 신기하게도 이젠 자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 귀는 닫혔고, 내 눈도 안경을 벗은 것처럼 자연의 풍광이 어른거리기만 할 뿐이다. 교정에 핀 분꽃과 백일홍도 눈 맞추는 일 없이 지나치게 되고, 물들어가는 빨간 낙엽도 내 가슴을 데우지 못하고 있어 누군가 지금 가을에 대해 시를 써 보라고 하면 나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것 같다. 자연을 아는 데는 1만 시간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자연은 42년간 내 곁에 있었지만 우리의 인생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 같다. 은퇴한 후 꽃을 가꾸고 텃밭을 일구며 자연과 함께하는 시인이 되고 싶지만, 마냥 꿈으로 끝나는 건 아닐까?
며칠 전 퇴근하는 길에 텃밭에 들렀다. 양쪽 밭과 뒤엉킨 텃밭을 상상했는데 웬걸, 양쪽 밭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을농사가 한창이다. 그럼 나의 텃밭은?  여섯 주의 병든 고추를 뽑아냈던 자리에 무가 심겨져 있었다. 조금 늦게 심었던 케일과 대파, 그리고 7월초에 씨를 뿌렸던 상추, 근대, 아욱은 누군가 김매기를 하며 따 먹고 관리한 눈치다. 방울토마토와 가지 열매는 아직까지 새들의 밥상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마음씨 좋은 부부가 나를 대신해 무씨를 뿌려주었을까? 건강을 되찾은 아저씨가 노는 땅이 아까워 무를 심으셨을까? 다행이다. 땅이 제 구실을 하도록 나대신 도와 준 누군가가 참 고맙다. 박았던 지주대를 뽑아내고 작물들을 잘 정리해서 땅의 거름이 되게 해야겠다. 이것이 내가 버린 땅에게 갖출 수 있는 마지막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황망한 나의 정원. 그래, 이제 정리해야겠다. 다행히 여름동안 긴 잠을 자던 바람개비 사랑초와 시클라멘이 깨어나 주었고, 동백들의 봉오리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그런데 저건 뭘까? 베란다 벽에 솟아난 저 푸른 잎은?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본다. 파란색 줄기가 6개나 올라와 여러 장의 잎을 내고 있다. 벽에 기대어 둔 채 버리는 것조차 잊었던 파키라 고목? 2월부터 지금까지 흙 한번, 물 한번 입에 대지 못한 채 여름을 견디고 공중에서 살아남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계절을 착각하고 청아한 꽃을 피운 저 고광나무처럼, 미리 봄빛을 당겨온 듯 돋아난 삼지구엽초 새순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이 폐허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 고목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오목한 화분받침대로 얼른 파키라 고목을 옮기고 밑둥에 물을 주는데,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시 이 생명에게 집을 내어주고, 텃밭을 정리하고, 폐허의 흔적들을 거둔 후 다시 나의 정원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면 왠지 고봉산에 올라 낙엽 부딪는 가을바람 소리도, 매끈한 나뭇가지가 흔들어대는 겨울바람 소리도 예전처럼 다시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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