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혜숙 어린이책 번역가, 주엽어린이도서관에서 토크쇼 열어

지난 23일, 주엽어린이도서관에서 ‘아주 특별한 명품 릴레이 강의- 그림책 토크쇼’가 열렸다. 고양시도서관센터가 주최한 그림책 토크쇼는 한 권의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이들의 수고가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마련된 행사다. 세 번째 시간 주인공으로 엄혜숙 번역가가 초청됐다. 어린이책 전문출판사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한 엄혜숙 번역가는 유아, 어린이, 청소년 관련 책 300여 권을 솜씨 좋게 우리말로 옮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어린이책 번역가 중 한 명이다.
토크쇼는 실내의 메인 조명이 소등된 채 진행됐다. 진행자인 김중석 그림책작가와 초대강사인 엄혜숙 번역가가 나란히 앉은 테이블 뒤에 놓인 지구본의 은은한 불빛이 조명 역할을 대신했다. 지구를 돌아 한국에 건너온 ‘낯선 언어’를 번역하는 주인공과 무척 어울리는 세팅이다. 도서관을 찾은 30여 명 참가자들은 쿠션 의자에 몸을 기대거나 바닥에 앉은 자유분방한 자세로 엄혜숙 번역가의 강의를 경청했다. 화기애애하게 진행된 강의의 주요 내용을 옮긴다.

 

주엽어린이도서관을 찾은 엄혜숙 어린이책 번역가(사진 왼쪽)와 김중석 그림책작가는 평소의 절친한 친분을 과시하며 정겹고 유쾌한 입담으로 이야기를 펼쳤다.   

 

가장 자연스러운 화법 찾으려 고심

어린이책과 인연을 맺은 지 30여 년이 됐다.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에서 일하며 짬짬이 자료실에 있는 외국 책을 재미삼아 번역해보곤 했는데, 주변에서 책으로 내보자는 권유가 있어서 우연히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돌이켜보면 내 의도보다는 누군가의 제안으로 중요한 일들이 진행되곤 했다.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독자 중 한 분이 ‘번역하신 책 덕분에 우울증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됐다’며 인사를 건네준 게 기억에 남는다. 번역가도 반쯤은 작가로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보람을 느꼈다.

번역가는 단순히 글의 내용을 옮기는 이가 아니다. 정확함과 함께 ‘아름답게’ 옮기는 게 중요하다. 원작의 고유한 언어 느낌을 살리기 위해 어떤 화법을 선택할 것인가가 번역가의 가장 큰 고민이다. 특히 그림책은 기본적으로 읽어주는 책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입말의 맛을 살려야 한다. 좋은 화법을 찾기 위해 책 전체를 초벌 번역한 후 일정 기간 안에서 묵히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편집자로 일했던 경험이 번역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래도 번역가는 작가의 의도에 집중하게 되고, 편집자는 독자를 의식하게 되는데, 양쪽의 특성을 두루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책 토크쇼를 찾은 참가자들이 자유분방하고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전문지식과 언어 감각 공부 병행

어린이 책 번역이라고 해서 전문성과 무관한 건 아니다. 전문지식이 배경에 깔리는 책을 번역할 때는 꽤 열심히 공부도 한다. 세계의 여러 도시를 소개한 책을 번역하면서 각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기도 했고, 『로자 파크스의 버스』를 번역할 땐 주인공의 두툼한 전기를 정독하며 미국의 흑인과 여성 인권운동역사를 살피기도 했다. 일도 하고 재미나게 공부도 하니 두루 좋은 일이라며 스스로를 격려하곤 한다.

좋은 번역을 위해선 편집자와 편안하고 생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편집자는 번역가의 동업자이자 조언자다. 서로 다른 감각의 차이를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차이를 좁히는 과정에서 좋은 결과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고마운 편집자는 ‘뭔가 찜찜했던 점을 콕 짚어주는 편집자’더라.

전공은 독일어를 공부했지만, 최근에는 독일어보다는 영어와 일본어 번역작업을 많이 한다. 10여 년  전 그림책과 아동문학에 대해 본격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본의 한 대학원에서 1년 반 정도 공부를 하고 왔다. 처음부터 번역을 염두에 두고 다녀온 건 아니었지만, 그 경험이 계기가 되어 이후 일본어 번역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 때 만난 재일한국인 논픽션 작가의 실제 이야기를 직접 동화로 펴내기도 했다.

나는 각각의 언어 능력 자체가 완벽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우리말 능력을 다듬어 온 게 번역일의 가장 든든한 자산이 됐다. 우리말 감각을 다듬기 위해 평소에 시를 많이 읽는다. 시는 모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매만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쾌감 즐기면서 오래도록 일하고파

번역가는 언어를 저쪽 해안에서 이쪽 해안으로 옮겨주는 뱃사공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흥미로운 책을 가장 먼저 만난다는 기쁨이 번역가가 누리는 기쁨 중 하나다. 겸손한 마음으로 일을 즐기면서 뱃사공 노릇을 꾸준히 할 생각이다. 손가락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김중석 작가, 엄혜숙 번역가가 행사장을 찾은 어린이 독자 송승아(9살, 대화동)양과 함께 엄혜숙 번역가가 옮긴 책을 한 권씩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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