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윤 인문학 작가
수능 전날 대화역 한 상가에서 한 학생이 투신자살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정말로 비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학생이 추락하면서 지나가는 고3 수험생 두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두 학생은 다음 날 수능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었을까?

우리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입시 위주로 운영되는 학교 시스템과 수능이라는 시험제도가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매년 수능을 전후하여 수험생의 자살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10~19세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과연 자살일까? 이는 분명 사회적 타살이다. 죽음을 방조한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자유롭게 배우고 발랄하게 꿈꾸고 성장해야할 청소년들이 학교시험과 수능시험에 갇혀 성적이라는 족쇄가 채워진 채 어두운 수인(囚人)생활을 하고 있다. 그 결과는 뻔하다. 몇몇 아이만이 생존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잃은 채 방황할 것이다.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할 것인가?

대한민국 교육현장은 거대한 세월호다. 아니다. 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노예로 삼아야만 운행 가능한 노예선이다. 감시와 처벌이 학교의 본질이다. 아니라고? 시험으로 아이들을 관리하고, 성적으로 아이들을 협박하고, 생기부로 낙인을 찍고, 등급으로 차별화하고, 결국에 가서는 입시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좌절시키는 것이 학교 아니던가. 이 끔찍한 체계와 질서를 부정하는 아이들을 문제아로 처벌하고, 체계에 순응하는 아이들로 순치시키는 것이 학교의 기능 아니던가.

대통령이 바뀐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학교 교장이 개혁적이면 이 문제가 없어질 것인가? 선한 선생들이 많아지면 가능할까? 학부모가 들고 일어나면 해결될까? 아니다. 권력도, 학교도, 교사도, 심지어는 학부모도 교육문제에 관해서는 공범이다. 어른들의 탐욕스런 욕망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노예의 문제를 주인이 해결할 수 없듯이, 노동자의 문제를 자본가가 해결할 수 없듯이, 여성의 문제를 남성이 해결할 수 없듯이, 학생의 문제를 선생이 해결할 수 없다. 역사는 고통 받은 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아, 가만히 있지 마라. 너희를 옥죄는 학교와 교육제도에서 벗어나라. 그 어떠한 권력도 너희를 넘보지 못하게 하라. 희망의 촛불을 켜고, 너희 스스로가 권력이 되고, 교육의 주인이 되라. 어른의 공포에서 벗어나 너희들의 상상력에 미래를 맡겨라.

이렇게 외치고 싶은데, 오호 통제라. 수능 당일 날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사건 하나가 또 터졌다. 수능을 치르고 있는 학 학생의 가방에서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에게 따뜻한 밥 한끼 먹으려는 엄마의 사랑의 손길이 그 학생을 수능고사장에서 쫓겨나게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고사장에서 쫓겨난 그 학생은 같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에게 사과의 글을 올렸다. 이 얼마나 미친 짓인가?

솔직히 이야기하자. 수능은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무력화된다. 모르면 검색창에서 확인하면 되고, 어려운 문제는 카톡에서 같이 토론하여 해결하면 된다. 우리의 일상사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까 스마트폰 하나면 무력화되는 수능시험을 학생들은 12년 동안 준비한 것이다. 이 무슨 허송세월이란 말인가? 이제 누구에게나 스마트폰은 필수품이다. 그 필수품을 빼앗고 치르는 시험이 과연 21세기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시험일까? 우리가 이러려고 12년 동안 개고생하며 시험준비를 했나,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차라리 지금의 수능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빠른 해결책이다.

지금 광화문에서는 연일 수십만의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미치광이 권력자를 하야시키려는 국민의 행동이다. 하지만 촛불을 밝혀야할 곳이 비단 광화문뿐인가? 사법기관과 행정기관, 입법기관 모두 앞에서 촛불을 들어야하지 않을까? 아니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바로 우리 동네 학교 앞에서 촛불을 들어야하지 않을까? 투신자살한 학생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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