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수 교수가 들려주는 행주기씨의 역사와 인물 이야기

행주기씨의 선산인 원당 도선산에 자리한 청백당 앞에 선 기연수 교수.

2000년 전 득성(得姓) 이후 하나의 본 이어와
청백리와 대학자, 의병장, 항일투사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자부심
"다시 돌아온 고양에서 선조들의 역사 알리고파"
 

고양대로를 가로지르며 높이 솟아있는 3호선 원당역을 지나다보면 한양골프장 방향의 숲 초입에 크고 넓은 기와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야산 중턱까지 이어진 넓은 묘역과 석물들로 둘러싸인 채 여러 채의 한옥을 함께 거느리고 있는 이곳은 한 가문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고양땅을 기반으로 득성(得姓)을 한 이래 천년이 두 번 바뀌도록 하나의 본을 유지하고 있는 행주기씨(幸州奇氏)가 그들이다.

이곳 행주기씨 대종중 원당 도선산에는 기씨 조상들의 넋이 잠든 묘와 건물들이 모여 있다. 그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고양시 향토문화재 17호인 기준선생묘, 22호인 기건선생묘와 신도비, 23호인 기응세선생묘 등 3건이나 된다. 비석에는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과 중국의 명필 주지번이 쓴 글씨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현암 기건 선생과 복재 기준 선생 등을 모시는 사당인 덕양재(德陽齋)와 기건을 비롯한 조광조, 기준, 정지운, 기대승, 기정진 선생 등의 위패를 모신 서원 덕의사(德義祠)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500년 만에 성씨의 뿌리를 찾아 온 기연수 교수

행주기씨 가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도선산 대종중 청백당(淸白堂)에 살고 있는 기연수 명예교수를 찾았다. 검정 두루마기 차림의 기연수 명예교수가 친절한 미소로 기자를 맞으며 향이 그윽한 차를 건넨다.
“행주기씨 가문의 성지 방문을 환영합니다.”  

기연수 명예교수는 한국외국어대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다 10년 전 정년퇴임을 했다. 은퇴 후 책을 보며 만년의 지혜를 닦기 위해 그가 선택한 장소는 바로 조상들의 뿌리가 시작된 곳, 원당이었다. 퇴직금 주머니를 풀어 덩그러니 방치되고 있던 기와 건물의 내부 공간을 깔끔하게 리모델링하고 자리를 잡은 게 2010년의 일이니 그가 고양의 이웃이 된 지도 7년이 되었다. 기연수 교수는 현재도 (사)한러교류협회 회장,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장 등으로 일하며 바쁜 삶을 살고 있다. 행주기씨 대종중에서는 상임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고양을 세거지로 삼아 번성했던 행주기씨 선조들이 조선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1519년)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지요. 그 후 500년 만에 처음으로 제가 조상들이 사시던 땅에 다시 돌아온 셈입니다.”

걸출한 인물 배출한 명문가의 자부심

현재 우리나라에 기씨 성을 가진 이들은 2만5000여 명 정도라고 한다. 이 중 대부분이 전라도 광주와 장성에서 살고 있다. 오랜 역사에 비해 숫자가 많지 않은 까닭과 행주기씨임에도 고양땅에 거주하는 이가 적은 이유를 기연수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거지를 떠나 지방으로 흩어져야 했을 만큼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몇 차례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가요. 어느 가문에 견주어도 부럽지 않은 단단한 자부심이 행주기씨들에겐 있습니다.”

자부심의 첫 번째 근원은 자그마치 3000여 년에 이르는 긴 역사다. 행주기씨의 연원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운 기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연수 교수는 기자의 139대손이 된단다. 물론 상고사의 기록들은 근본적으로 엄정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서 전해진 아득한 이야기들은 행주기씨 가문의 정신적 토대다.

기자가 태상시조라면, 마한의 왕 기훈의 아들인 기우성(奇友誠)은 득성시조다. 그가 백제로 넘어와 오늘날의 행주와 덕양 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행주기씨라는 성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리적 역사만 깊다고 명문가라 할 수 있을까. 거기에 어울리는 선조들의 당당한 족적이 동반됐다는 것이 기연수 교수의 설명이다.
“예로부터 명문가라는 이름을 얻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지요. 가문에 불천위(不遷位) 청백리는 물론 문(文)자 시호를 가진 강직한 선비기질의 대학자가 있어야 합니다. 자랑 같지만 행주기씨 선조 중에는 세종조 청백리 기건 할아버지가 계시고, 문자시호의 문민공 기준, 문헌공 기대승, 문간공 기정진 등의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가문의 결속력도 견고하다. 행주기씨들은 매 년 5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자신들의 성지인 이곳 도선산에 모여 ‘종친의 날' 행사를 치른다. 전국에서 약 400~500명에 이르는 종친들이 모여 시제를 지내는 것이다. 기연수 교수와의 인연으로 지난해엔 주한 러시아 대사가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한 명문가 가문의 시제 모시는 걸 보니 경복궁 등에서 열리는 국가 공식 행사보다도 훨씬 더 생동감 있고 흥미롭다”면서 “여기야말로 진짜 한국 문화와 전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현장”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행주기씨 '종친의 날' 선세단 추모 행사.

태상시조, 득성시조, (중)시조, 중흥조로 이어지는 역사특강

기연수 교수의 이야기는 행주기씨의 태상시조와 득성시조에 이어 중시조, 중흥조로 이어진다. 먼저 중시조(中始祖)는 족보에 맨 처음 기재된 조상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족보가 처음 들어온 게 고려중기인데 족보가 기록되면서부터 역사는 확실한 기록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행주기씨의 중시조는 고려 인종조의 문하평장사 기순우(奇純祐)이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원나라 혜종의 황후로 천하를 호령했던 기황후(奇皇后)다.

다음으로 중흥조(中興祖)는 가문의 세력을 다시 크게 일으킨 사람을 일컫는다. 행주기씨의 중흥조는 세종대왕에 의해 포의발탁되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선정을 폈던 청파(靑坡) 기건(奇虔)이다. 한강변에 초막을 짓고 살던 그를 세종대왕이 권면하여 중용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다들 기피하려 하는 제주목사의 직임을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치러내며 유능한 목민관이자 청백리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제주에서 전해오는 향토사지에 따르면 청파 기건은 해녀들의 수고를 담보로 한 미식을 거절하는 의미로 전복요리를 먹지 않겠노라 선언했다고 한다. 임기 중에 술도 전혀 입에 안 댄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남달랐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다.

청백리의 표상 청파 기건

당시 제주는 문명의 전래가 지체된 탓에 장례법을 몰라 망자의 시신을 바닷가에 버리곤 했는데 기건에 의해 비로소 장례 예법도 도입되었다. 기건의 꿈에 하얀 노인들이 나타나 고맙다고 인사하며 후손들을 축복했다는 이야기도 따라다닌다. 그는 제주도에 만연했던 나환자들을 위해 바닷가에 구질막을 짓기도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질병 치료소를 운영한 셈이다. 지금도 당시 구질막 터에 작은 기념비가 남아있다.

제주에서 돌아온 후 전라, 함경, 평양감사, 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한 기건으로 인해 비로소 행주 기씨들은 조선조의 명문가 반열에 오른다. 만년에 그가 굳은 절개로 세조의 등용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기건의 생애와 잘 어울리는 에필로그다.

기묘명현으로 명예를 되찾은 복재 기준

그리고 행주 기씨가 세거지인 고양땅을 떠나기 전에 배출한 마지막 인물이 등장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복재(服齋) 기준(奇遵)선생이다. 고양의 문봉서원에 배향된 고양 8현 중 한 분인 기준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모범적인 선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알려진대로 기묘사화란 조광조가 중심이 되어 국가의 혁신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권력을 빼앗기고 역적도당으로 내몰린 사건이다. 그 사건의 중심에 복재 기준이 서 있었던 것. 조광조 보다 10살 연하였던 기준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조광조를 도와 개혁을 주도하며 일세를 풍미하지만 기묘사화로 인해 귀양을 갔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당시 원당에서 행주까지 약 30여만 평의 땅에 자리잡고 있던 행주기씨 문중도 풍비박산이 되어 세거지였던 고양을 떠나 김포, 경주, 충청도 서산, 전라도 장성, 광주 등지로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역사는 때로 스스로의 과오를 바로잡기도 하는 법. 기묘사화로 희생된 이들의 신원은 복권되어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기개와 충의를 지킨 선비의 표상으로 우러름을 받는다. 하지만 행주기씨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전라도를 중심으로 세를 이어가게 된다.

퇴계와 학문을 논한 대학자 고봉 기대승

기묘사화로 인해 가문이 흩어지는 화를 입었지만 행주기씨 가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뛰어난 인물이 등장한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다. 기건이 청백리를, 기준이 올곧은 기개를 상징한다면 기대승은 이에 높은 학문적 성취를 더했다. 기준의 조카인 기대승은 26살 연상의 퇴계 이황과 벌인 철학 논쟁인 사칠논변(四七論辨)으로 유명하다. 이황의 주리설과는 관점을 달리 하는 주기설을 제창하며 8년동안 서신을 통해 치열한 논쟁을 벌인 사칠논변은 조선의 유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학문 논쟁으로 손꼽힌다. 결국은 퇴계 선생이 고봉의 학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생산적 논쟁은 마무리된다.

비록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퇴계의 위상에 비해 규모 있는 학파를 형성하지 못한 고봉 기대승의 명성이 저평가된 점은 아쉽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와 기의 상호 작용을 주목한 그의 사상은 율곡 이이의 학문이 있게 했고, 그 후 후학들에게도 지속적인 영감을 주고 있다. 

기대승에 대해 기연수 교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봉 할아버지는 지방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뿌리가 고양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분의 호가 고봉이라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고봉산이 있는 고양의 옛 이름이 고봉현 아닙니까.” 그러면서 호는 높은 봉우리라는 뜻의 고봉이고, 이름은 크게 오른다는 대승이니, 하늘이 볼 때 하늘을 치받을 듯 너무 기가 세서 일찌감치 데려갔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온다는 말도 들려줬다. 43세 이른 나이에 명을 다 한 대학자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런 뒷얘기를 만들어 냈으리라. 

청백당에 소장되어 있는 고봉 기대승의 필적.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 노사 기정진

행주기씨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이다. 그는 19세기 조선 유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꼽힌다. 81세로 장수했던 그는 이퇴계와 기대승, 이율곡의 사상을 집대성해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미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한편으로는 외세의 유입으로 인한 혼란의 현실 속에서 ‘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노사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당한 사고로 눈을 한 쪽 잃은 채 살았답니다. 그런 그를 빗대어 ‘장안만목(長安萬目)이 불여기일목(不如奇一目)’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죠.”
서울 장안의 만 사람의 눈이 기가의 눈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니 어마어마한 칭송인 셈이다. 

기건, 기준, 기대승, 기정진으로 이어지는 충절과 학문의 기개는 후세에게 이어져 국운이 다 해가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기씨 집안에서 전라도 일원의 많은 의병장과 독립군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과 이야기의 지층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며 행주기씨 가문의 기나긴 시간이 한 눈에 요약되는 느낌이었다. 복잡한 족보 얘기라 고리타분할 것 같지만 기연수 교수의 설명이 워낙 명쾌하고 간결해 귀에 쏙쏙 들어온다. 3000년을 압축한 역사 특강이었다고나 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고양땅에 아주 두툼하고 세밀한 시간과 이야기의 지층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만남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기씨 식구들중에 최근에 유명한 분들은 없나요?”
기다렸다는 듯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요즘엔 기씨들이 운동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있지요. 양궁선수 기보배와 축구선수 기성용이 있잖아요. 전 국민이 응원하는 선수들이니 아주 기분이 좋지요.”
그렇구나. 과거는 현재에게 자신의 임무를 생동감 있게 인수인계한다. 

후손들이 조성한 묘역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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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에 기황후의 흔적 남아있다"

행주기씨 유허비, 생가터, 기감천(奇甘泉) 남아있어
행주산성지역발전위원회 서은택 위원장과 동행 답사

서은택 위원장이 행주산성의 사면에 자리한 기황후의 생가터를 가리키고 있다.

행주기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기황후다. 기황후의 흔적을 찾으려면 원당이 아닌 행주산성이 자리한 행주내동으로 가야 한다. 기황후가 태어나 성장한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다.

기황후는 행주기씨 기자오(奇子敖)의 딸로 태어나 공녀(貢女)로 원나라 조정에 보내졌다가 원순제(혜종)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여인이다. 기황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함께 따라다니지만, 당시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실권 황후로서 그가 미친 다양한 영향력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기황후 역시 제주와 인연이 깊다. 그녀는 제2황후 시절에 득남을 기원하는 불공을 드린다는 명분으로 제주(당시 탐라국)에 큰 절을 짓고 이름을 원당사(元堂寺)라고 명명한다. 기연수 교수는 원당사라는 절의 이름 역시 자신의 친정인 고양땅 원당의 지명에서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곳에는 지금도 당시에 세운 아름다운 석탑(보물 제 1187호 제주 불탑사 5층석탑)이 남아있다. 기황후는 제주도에 목장을 조성해 몽골말을 도입해 오늘날의 제주마의 기원이 되게 한 이도 기황후다. 

정치와 제도적 측면에서 기황후가 남긴 흔적은 더욱 선명하다. 그녀는 황후라는 막강한 지위를 활용해 고려가 주권 국가로서 행세하도록 다각도로 도왔다. 고려를 하나의 원나라 지방으로 만들자는 소위 입성론(立省論)을 적극 가로막았고, 원나라에 대한 고려의 공녀제도를 중단시킨 것도 기황후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기황후로 인해 고려의 다양한 문물과 제도가 원제국에 유행하기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최초의 한류 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기황후라는 말이다.

기황후의 생가터를 확인하기 위해 행주산성지역발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서은택 위원장과 동행해 행주산성에 올랐다. 토성 산책로 아래로 행주내동 마을로 이어진 사면에 행주기씨 발상지 유허비가 당당히 서 있었고, 그 옆에 기황후 생가터가 있었다. 생가 옆 골짜기에는 기씨들이 물을 마셨다는 기감천(奇甘泉)이라는 약수터도 남아있다.

“문화재 보전구역 안에 자리하고 있지만, 탐방로에서 비껴 난 위치에 있다 보니 고양 시민들 중에서도 이곳을 아는 이가 거의 없어요. 조명할만한 역사적 자산을 아깝게 방치하고 있는 셈이죠.”
서은택 위원장은 삼국시대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행주산성의 가치가 단순히 권율장군의 행주대첩만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쉽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황후의 역사적 의미와 생가터를 잘 연결하고 개발하면 행주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봅니다. 국내는 물론 중국의 관광객들에게까지 관심을 끌 만한 멋진 역사문화자원이 되지 않을까요?” 

이곳이 행주기씨의 발상지임을 알리는 행주기씨 유허비.


기씨들이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기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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