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저자 박준영·박상규 북콘서트

22일 열린 '지연된 정의' 북콘서트에 초청된 저자와 진행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 왼쪽부터)박준영 변호사, 고상만 인권운동가, 박상규 기자.

[고양신문] 책 『지연된 정의』는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은 잘못된 재판으로 억울한 수형생활을 한 사법 피해자들의 재심(사법 판단이 끝난 사건을 다시 재판하는 것)을 요청해 무죄를 이끌어낸 ‘시민변호사’ 박준영과, 그의 활동을 호소력 있는 글로 기록한 ‘백수 기자’ 박상규의 공동 창작물이다. 박준영 변호사의 활동은 다음 스토리펀딩 사상 최대의 후원자와 후원액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된 ‘재심’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책을 쓴 파산 변호사와 백수 기자가 고양의 독자들을 만났다. 고양신문과 한양문고가 함께 마련한 ‘『지연된 정의』 저자 초청 더 친절한 북콘서트’가 ‘우리 사회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지난 22일 한양문고 주엽점에서 열렸다. 이날 북콘서트에는 60여 명의 청중들이 참석해 두 저자의 강연을 경청했다. 강의 후엔 인권운동가 고상만씨의 사회로 대담이 진행됐고 청중들과의 질의 응답도 이어졌다. 청중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마무리 된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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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이 잃어버린 ‘말’을 찾아주자”

- 백수 기자 박상규

사법 피해자들 자신의 ‘말’ 잃어
막혔던 말 트였을 때 가장 감격
우리가 외면했던 목소리 돌아보자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 활동하며 책을 썼다. 책에는 오랫동안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이 등장한다. 익산 택시기사 사건, 삼례 나라수퍼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피해자들이 그들이다. 다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들을 여러 번 만나다 보니 이들이 하는 말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째, 말을 안 한다. 둘째, 말을 해도 이상한 말을 한다. 셋째,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을 한다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성질이 날 지경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억울함을 적극적으로 말해도 모자랄 판에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 박준영 변호사가 이렇게 설명하더라. “하도 오래 누명을 쓰고 살다보니 이렇게밖에 대응을 못하는 거다. 그분들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떠올랐다. 외국에 연수를 갔을 때 영어를 못하니 굉장히 왜소해지고 위축되더라. 나만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랄까.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언어가 다른 세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같은 한국말을 써도 누군가는 굉장한 답답함과 거대한 벽을 느낄 수 있다. 책 속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권력이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누가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는지를 살펴보라. 익산과 삼례 사건의 주인공들은 학력이 짧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말할 기회를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이들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사회적 약자들은 입을 닫아버린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때 선택할 수 있는 게 뭐겠는가. 어쩌면 말 안하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게 당연한 거다.

재심을 열지 말지를 검토하는 첫 공판날이었다. 감옥에서 10년 살고, 5년동안 재심을 준비했으니, 15년만에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생긴 셈이다. 그런데 담당 판사가 “어떻게 살인죄를 허위자백할 수 있나?”라고 묻자 피해자가 그만 입을 닫아버리더라.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말을 수없이 했는데도 아무도 안 믿어놓고, 판사가 똑같이 말하니 거대한 벽을 만난 것이다. 사회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언어를 잃어버린다. 우리가 그분들의 말을 막아버린 것이다.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했던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억울한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날이 아니다. 박 변호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해자들에게 계속 말할 기회를 주곤 한다. 그러다 보면 드디어 그들의 입에서 말이 터지는 순간이 있다. 마치 그동안 눌려 있던 말들이 막 뛰쳐나오려는 듯 이 얘기 저 얘기를 쏟아내다가 결국에는 울어버리더라. 말을 잃어버린 이가 말을 다시 찾는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억울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언론사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언론사에 접근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로비를 겨우 통과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줄 만큼 한가한 기자들이 없다. 반면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사회가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라. 우리 스스로가 또 다른 익산, 삼례와 같은 피해자를 안 만들려면 누구에게나 동등한 권리를 주고, 무엇보다도 약자에게도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성찰하며, 나는 누구의 말을 외면하며 살아왔는가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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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없는 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자”

- 재심 변호사 박준영

국가 권력의 잘못 인정과 사과 필요
정의가 성공하는 선례 만들고파
외면된 고통에 사회가 손 내밀어야


나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스로의 부끄러운 과거나 부족한 이야기를 자주 꺼내곤 한다. 이유가 있다. 누군가를 특별한 대상으로 생각하면 그의 행동을 실천하려는 엄두를 못 낸다. 상대를 나와 다를 바 없는 이로 인식해야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재심 최종변론 때 판사에게 법정이 억울한 사법 피해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판사는 우리를 실망시켰다. 유감은 표현하지만, 5년 전 재판부 역시 최선을 다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면죄부를 주는 말을 했다. 정말 화가 났다. 우리 사회가 선의로 해석할 게 있고, 그럴 수 없는 게 있는데 잘못된 사법 판단으로 억울하게 15년 세월을 보낸 이들 앞에서 재판의 과오를 어떻게 선의로 해석할 수 있는가?

스토리펀딩이 성공하기까지 사실 무척 힘들었다. 사무실 월세가 열 달이 밀리고 은행 대출 연장이 안 될 때는 정말 슬펐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 가까운 이들부터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펀딩이 성공하고 영화가 개봉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팔자가 달라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모이고 내가 하는 일에 관심과 호의를 표한다.

이런 일을 겪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들이 큰 이슈에만 주목하고 몰리는 현상이 과연 옳은가. 내 사무실 앞에는 혹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절실한 억울함을 말하면서도 ‘작은 고통’을 들어달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통에 크고 작은 게 어디 있나? 누구나 스스로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작은 것’으로 축소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물론 사회적 약자들은 때때로 비상식적인 피해의식과 불합리해 보이는 요구를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해 의식에 쩔은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해야 한다. 국가나 사회로부터 피해를 받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자신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삼례, 익산 사건의 무죄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굳이 진범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며,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 사과를 이끌어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측은지심을 이 사회에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범들의 사과를 이끌어 낸 동기는 법리가 아니다. 피해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를 이해하게 한 것이 그들 안에 있는 측은지심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스토리펀딩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의 측은지심이 나를 살려주지 않았나.

얼마 전 한 방송에 출연했는데, 방청객 한 분이 질문을 했다. “정의롭게 살라고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지만, 그렇게 살면 우리 사회가 손해 보는 사회 아니냐?” 맞다. 정의롭게 사는 사람이 분명 손해를 보는 사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에 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똑바로 살아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저렇게 살아도 의미 있다는 선례를 남기고 싶은 욕심이랄까.

요즘 젊은이들을 보라. 예전엔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고생을 사서 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 그랬다가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구조니까. 이건 정말 숨막히는 사회다. 사회적 관용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가 잘못한 사람 손도 잡아주고, 억울한 사람의 등도 두드려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한양문고 주엽점에서 진행된 이번 북콘서트에는 60여명의 청중들이 참석해 저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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