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촛불집회 매주 참석한 원로 사회학자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 지성의 힘 목도
혈연주의, 물질주의 넘어선 가치 열망
각성된 시민들의 분화와 연대 기대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고양신문]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원로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주엽동 문촌마을에 살고 있는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를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사회이론학회,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회장을 지낸,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사회학자다. 또한 녹색연합 상임대표의 이력에서 보듯 생태와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문제도 박영신 교수의 오랜 관심사다.  
올해로 팔순이 된 박영신 교수는 더 없이 부드러운 인상과 말투로 인사를 건네왔지만, 촛불집회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자 형형한 눈빛으로 명쾌한 논지를 전개했다. 인터뷰 내용을 요약했다.
  

 

개개인의 분노가 집단지성의 힘으로 모여

4개월 가까이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나 또한 아내가 활동하는 여성운동단체와 내가 활동하는 반핵 모임을 번갈아 오가며 거의 매 번 참여했다. 수많은 시민들과 촛불을 들고, 박수를 치며, 눈물과 분노를 표현하는 자리에 함께 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광장에서 내가 목격한 건 하나의 커다란 물음이었다. 단순히 특정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가 왜 이 모양 되었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광장의 에너지를 이끌고 있었다. 함께 질문하고, 격분하고, 뭔가를 바꿔보자는 열망을 서로를 통해 주고 받았다.

자연스레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양상이 떠올랐다. 그 때는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연대했던 기억이 있다. 스위치를 누르면 일제히 불이 들어오는 조직이라고나 할까.
반면 오늘의 촛불 광장은 조직망이 수없이 많은 갈래로 분화돼 있었다. 다양한 요구를 담은 수많은 깃발들이 나부꼈고,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채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이들도 많았다. 학생들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절박한 이유’가 저들을 광화문으로 불러냈을까?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젊은이들의 박탈감이었다. ‘정유라’로 대변되는 기회의 불공평이 그들을 자극한 것 같다. 대통령의 영역에 걸맞지 않는 사소한 영역까지 비리의 영향력이 발휘됐다는 사실에 대중들도 분노했다, 사소하면서도 구체적인 분노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거대한 비리보다도 생생한 현실감을 일깨운 게 아닌가 생각한다.

분노의 폭은 다양했지만 분노의 힘이 집단적인 시민지성으로 모아지는 모습도 보았다. 이번 경험을 통해 그동안 지식인들에게 걸었던 기대와 시선을 응당 시민들에게 돌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깨어 있는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지성이 지식인들의 폐쇄적인 지성보다 훨씬 신뢰할 만 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시민이 깨어 있는 파수꾼 돼야

나는 대통령의 비리가 하나 둘 밝혀지며 거대한 촛불의 분노에 이어 탄핵에 이른 시간 자체가 아주 훌륭한 시민교육의 과정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이들은 아마도 시민의 권리와 책임에 대해 자녀들과 대화했을 것이다. 그 대화의 과정에서 부모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배웠을 것이다. 광장에서만 가능한 역동적인 시민교육이 이뤄진 것이다.

시민교육은 왜 필요한가. 나는 우리 나라의 소위 엘리트 교육을 믿지 않는다. 청문회에 나온 이들의 태도를 보라. 최고의 교육적 혜택을 받고 고시에 합격하고, 국가의 최고위직을 차지한 이들에게서 과연 보편적인 정직함을 찾아볼 수 있던가? 아마도 성공을 위해 일상적 감성을 희생시키는 삶을 살다 보니 그들에게선 일반적 수준의 도덕적 감각을 상실한 게 아닐까.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과연 저런 엘리트들에 기대어 경영돼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시민교육의 토대가 놓여지리라.

이제 탄핵이 인용됐다. 일차적 목표가 달성되자 정치권은 말한다. 이제 거리의 집회를 그만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이야말로 눈 부릅뜨고 언제라도 촛불의 광장으로 다시 뛰쳐나올 수 있는, 24시간 깨어 있는 시민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고 싶다. 각성한 시민이라면 자기 세계에 갇히지 말고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균형 있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 촛불 들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권력자들에게 늘 상기시켜야 한다. 선거철 뿐만 아니라 보통 때에도 깨어 있는 시민들이 정치인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위임된 독재자’를 감시하는 깨어있는 파수꾼으로서의 시민의 역할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재조정하는 계기

이번 경험이 우리 사회에서 보다 본질적인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생각하는 힘을 다시 세우고, 우리 삶의 방향을 제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잘사는 이를, 금수저를 부러워하는 우리 사회의 비전을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탄핵을 전후한 경험에서 얻은 에너지로 정치 교체의 요구를 넘어, 삶을 보는 눈을 바꾸고, 공동체의 가치를 재조정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인격체와 인격체의 만남으로 가도록 보다 깊은 차원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인간관계를 수지타산의 관계로 보지 않고 인격체와 인격체가 만나는 깊은 수준의 인간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다행히도 이번 사태를 겪으며 거짓된 기득권자들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막연히 그들을 부러워하던 마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있는 자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시민의 당당함을 보여줘야 한다. 물질과 성공의 욕망이 이끄는 삶은 시민들을 자기 사고 능력을 상실한 로봇으로 만든다.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이를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사사로움’에의 집착 넘어서자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건은 우리 사회는 ‘사사로움’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줬다. 박근혜를 지지했던 이들은 그가 가족이 없으니 사사로운 욕심이 없을 거라는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핏줄은 없지만 ‘유사 핏줄’을 가지고 있다. 사사로운 관계가 오히려 극대화된 것이다.
가족과 핏줄, 지연과 학연 등의 사사로운 관계에 대한 집착은 서양의 사회학으론 해석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특징이다. 물론 서양도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시민사회의 오랜 역사를 통해 사회적으로 그걸 극복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사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보다 큰 가치의 세계를 아직 세우지 못했다.

효도로 포장되는 혈통과 가부장의 가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숭상 받는다. 미풍양속을 낮춰 봐선 안 된다는 논리로 혈통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우리나라 진보의 한계다. 인간이 만든 것 중 그 어떤 것도 절대의 것은 없다. 그것이 물질이든 관념이든 무언가를 절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어떤 것도 검토의 대상, 질문의 대상, 부정의 대상이 돼야 한다. 사사로운 공간을 축소시키고, 공공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정의’의 문제도 질문해보자. 정의는 과연 청와대에만 있어야 하나? 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작은 정의’들이 실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안에서, 시민단체 안에서부터 민주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노력이 참 부족하다.  시민단체의 한계는 정신의 궁핍함이다. 시민단체가 유사가족을 강화하는 경우도 많다. 경제주의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패거리모임을 극복해야 한다.

경제제일주의가 삶을 초라하게 만들어

사사로움을 중시하는 경향과 함께 경제제일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먹고 사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이게 신적인 위치로 올라서는 순간 모든 삶의 가치는 초라해진다. 우리 5000만이 여지껏 그렇게 물질을 떠받들며 초라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 가치가 한계를 만났다. 아마도 공평의 기준을 용인할 수 있는 어느 선이 있는 것 같다. 넘어가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용인의 선이 선명히 드러났다. 그 분노의 용인선이 조금씩 하향조정 되기를 기대하고 싶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삶의 지향성을 재조정하는 시민운동이 전개되었으면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물질적 성공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었다. 삶도 구원도 참 초라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웃에 대한 시민적 보살핌의 정신, 공평함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공식화된 시대의 신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나는 비록 소수지만 누군가가 여전히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시민들이 선출된 권력자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어야

탄핵이 마무리되면서 일부에선 섣불리 대통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지 못하면 역사의 진전은 없다. 청산의 대상들을 과격하게 심판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이들이 공공의 정치 영역에 다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함께 하며, 공공의 삶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꿈꿔본다. 때로는 세상과 대척하는 가치를 믿고 동참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용기를 내는 개인들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나는 특정 정당이 올바름을 독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정당에도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이가 시민단체에서도 일해야 하지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현실 정치에도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실정치의 다양성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포럼이나 시민운동단체, 생활 속의 정치결사체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들이 지역의 시의원과 국회의원을 불러 시민들의 요구를 당당히 청구하고, 선출된 권력자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제 깨어 있는 시민의 목소리를 감당할 그릇이 못 되는 정치인은 정치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삶의 주도권을 끌고 가야한다. 끊임없이, 정치를 시민 앞에 불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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