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의문사 다룬 연극 ‘이등병의 엄마’ 제작발표회
고상만 고양시 인권증진위원이 제작 총괄
다음 스토리펀딩 통해 2500명의 후원자 모아
“0000년도에 사망한 상병 000의 엄마입니다.”, “0000년도에 사망한 일병 000의 엄마입니다.” 군 의문사 유가족들은 자신을 소개하는 첫 머리에 아들의 사망 연도를 붙였다. 조국의 부름을 받아 머리를 짧게 자르고 군에 입대한 아들들은 가족의 품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 사망 당시의 계급을 여전히 달고 있었다.
군 의문사 사망사고 유족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다룬 다음 스토리펀딩 연극 ‘이등병의 엄마’ 제작발표회가 지난 23일 서울 동숭로에 있는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연습실에서 열렸다. ‘군(軍)사망사고 유족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주관한 이날 발표회에는 ‘이등병의 엄마’ 제작진과 출연배우, 군 의문사 피해 유가족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작품의 총괄 제작자는 다름 아닌 고양시 인권증진위원이자 본지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권운동가 고상만씨다. 최근 한양문고 주엽점에서 본인이 쓴 신간 『고상만의 수사반장』을 소개하는 북콘서트를 열기도 했던 고상만씨는 군 의문사 문제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이자 가장 열정적인 활동가다.
1998년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 김훈 중위 사망사건을 접한 것을 계기로 군 의문사 문제의 해결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군 의문사 문제의 실상과 국가의 무책임한 대응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하려고 연극을 구상했다”면서 “무엇보다도 유가족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을 작품 속에 최대한
담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도 한해 평균 150여 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 중 3분의 2는 ‘자살’로 처리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 진실은 영원히 묻혀버린다. 군 장병의 죽음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매도하고 마는 군 당국의 기본적 시각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국가가 징병할 권리만 행사하고, 징병에 따른 책임은 외면하고 있으니 끔찍한 ‘군대 잔혹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유가족들의 호소와 고상만 제작자의 끈질긴 요구가 반영되어 2014년 ‘의무복무 중 사망한 군인은 사망 원인 구분 없이 순직 처리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군 인사법 개정 법안이 만들어졌지만, 안타깝게도 국방부로부터 ‘법 개정 이전 피해자에게는 소급 적용이 안 된다’는 기습적인 통보가 날아왔다. 나라가 일찌감치 책임졌어야 할 의무를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외면해 버린 것.
일반인들의 인식 역시 또 다른 벽이었다. 군 의문사 문제를 마치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특정인들만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상만씨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했다. 다음 스토리펀딩으로 제작비를 모금해 군 의문사 문제를 다룬 연극을 제작하기로 한 것. 다행히 그의 끈질긴 노력과 유가족들의 간절한 염원이 통했기 때문일까. 다행스럽게도 2500명의 후원자들이 크고 작은 정성을 모아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작발표회 자리에서 고상만씨는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연극을 제작하게 된 취지와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했다.
“스토리펀딩에 참여해 주신 2500명의 후원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분들과의 오랜 약속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게 됐습니다.”
이어 군 의문사 유족들이 국회를 방문했던 모습을 담은 동영상 ‘저는 군대에 아들을 보낸 죄인입니다’가 상영됐다. 영상 속에는 군 의문사 사건에 대해 회피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군 당국을 향한 유가족들의 피맺힌 외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영상속의 한 유가족은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달라는 부탁이다”고 호소했다. 동영상이 상영되는 동안 자리를 함께 한 유가족들은 오랜 세월 단련된 슬픔 앞에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고상만 제작자는 이번 연극이 일회성 문화공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군 인권 정책을 바꾸기 위한 장기적인 캠페인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의 요구는 두 가지다. 국가가 불러 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대해 국가는 포괄적 책임을 지라는 것과, 군 사망사건의 진실을 명백히 규명해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제한적 활동을 펼치다가 그마저도 이명박 정부에 의해 해채된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국가인권위원회 수준의 독립된 민·관 합동기구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차기 정부에 강력히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무대에 오른 이들은 하나같이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기념사진을 찍을때도 손팻말에 적힌 구호들을 하나하나 함께 외쳤다. ‘국회는 군 의문사 규명법을 제정하라’, ‘사망 군인의 명예회복 순직 인정하라’, ‘군인 사망은 국가의 포괄적 책임 인정하라’…. 제작진과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절실한 호소에 국민들이 힘을 보태주길 간절히 소망했다.
“많은 분들이 극장을 찾아와 유족들의 손을 함께 잡고 뜨거운 가슴으로 울어주시기 바랍니다.”
스토리펀딩 연극 ‘이등병의 편지’
기간 : 5월 19일(금) ~ 28일(일)
장소 : 대학로 동숭무대 소극장
주관 : 군 사망사고 유족과 함께 하는 사람들
관람료 : 전석 30000원
문의 : 한강아트컴퍼니 02-3676-3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