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두 번째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해,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나는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치르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 때 벌어진 일이었다. 어처구니도 없고,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그때 좁디좁은 구치소 방에서 과거의 나의 삶을 곱씹고 곱씹었다.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우파니샤드』를 지급된 노트에 꾹꾹 베껴썼다. 평소라면 읽지 않을 두꺼운 고전을 반입하여 빵을 씹듯이 읽었다.

첫 번째 재판을 치르고도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항소를 했고, 다시 지루한 법정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계절은 여름을 지나서 겨울로 들어갔고, 독방으로 옮겨진 나는 오로지 나의 온기만으로 뼈에 스며드는 한기를 버텨내야 했다. 둘째 아이의 돌잔치도 참석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의 결과가 고작 이 꼴이냐며 자책하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고전을 낭송하고,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철창 밖에서는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때 외웠던 시중 하나가 도종환의 ‘등잔’이다.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으름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타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 쓰게 되고 마는데…’

시를 외우고 또 외웠다.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겨울을 넘기고 나서 나는 결국 풀려 나올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나고,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부는 개혁의 성과를 지우거나 후퇴시켰다. 광화문의 촛불이 밝혀지고 장미대선을 지나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개혁적 인사들이 등용되고, 지지도는 여전히 높다. 그러나 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 어떠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개혁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도종환 의원이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지명된 사실을 뉴스를 통해 확인했다. 벌써부터 야당은 흠집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개혁지지세력들은 분노의 언어를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다. 도종환의 시를 다시금 상기하고, 곱씹는 이유다.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나를 파괴시키는 분노와 좌절을 가라앉히고, 더 낮은 자세로 현실 속으로 들어가, 더 치열하고 치밀하게 살아야 한다.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말고. 더 낮게 더 낮게. 심지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개혁세력이 먼저 개혁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비출수 있다. 도종환의 ‘등잔’은 이렇게 끝난다.

'욕심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 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다시금 새로운 촛불을 들어야할 때가 왔다. 이번에 드는 촛불은 심지를 높이 세우는 촛불이 아니라, 심지를 조금은 가라앉히고 오래 오래 지속되는 촛불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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