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신작 '직지코드' 개봉 앞둔 ‘영원한 현역’ 정지영 감독

남부군’, ‘하얀전쟁’ 발표, 사회파 감독으로 부상
다양한 영화운동 최전선에서 좌장 역할 감당
13년 만에 만든 ‘부러진 화살’ 흥행으로 극적 재기
최초 금속활자 추적한 ‘직지코드’ 개봉 앞둬


정확히 30년 전의 기억.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기자는 한수산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거리의 악사’를 관람하러 종로3가 단성사 극장에 갔다가 개봉 인사를 하러 온 정지영 감독을 보았다. 당시 그는 매스컴으로부터 새로운 감각의 멜로 영화를 만드는 신세대 영화감독으로 조명을 받고 있었다. 회색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매를 가진 정지영 감독은 ‘세련되고 낭만적인 예술가’의 이미지 자체였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정지영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큰 어른’으로 불린다. 단순히 나이 때문만도, 한국영화계가 발전을 위해 몸부림치던 역사의 마디마다 그의 이름이 가장 앞자리에 놓였던 상징성 때문만도 아니다. 지금도 현장의 최전선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뚝심이야말로 ‘영원한 현역 감독’ 정지영의 가장 빛나는 덕목이 아닐까.

정지영 감독은 20년 전부터 고양시에 거주하고 있다. 자유로와 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빛마루 방송지원센터 15층에 자리한 영화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정지영 감독은 본인이 기획·제작한 영화 '직지코드'(감독 우광훈, 데이빗 레드맨)의 개봉을 앞두고 영화의 시사회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70대의 나이가 믿기지 않게 활력이 넘치는 그의 모습 속에 30년 전 종로에서 만났던 ‘패기만만한 젊은 감독’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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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감독 데뷔를 했나.
충무로 도제시스템에서 김수용, 임권택 감독 밑에서 연출 수업을 하다 30대 중반이던 1982년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초기에는 ‘추억의 빛’, ‘거리의 악사’ 등 나름의 새로운 감각을 담은 멜로 영화를 찍었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70년대 최악의 암흑기를 거쳐 80년대 신군부 정권 하에서 일종의 모색기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영화계도 6월 항쟁으로 6·29선언을 이끌어낸 1987년을 기점으로 나눠진다. 이전에는 서슬 퍼런 검열의 칼날 아래서 기를 펴지 못했다. 물론 이후에도 검열은 한동안 존재했지만, 뭔가를 시도할만한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나도 사회성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 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 ‘남부군’과 ‘하얀 전쟁’을 연이어 만들었다. 당시는 단관 개봉하던 시절이었는데 ‘남부군’이 서울에서 38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흥행스코어였다. 덕분에 박광수, 장선우, 박철수 등과 함께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 갈 차세대 감독으로 꼽히며 주목을 받았다.

▲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아쉽게도 활동이 좀 뜸했는데.
전성기가 짧게 끝났다. 94년 기대작이었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흥행에 실패하니 시장이 곧바로 나를 외면했다. 그래서 철저히 상업적 마인드로 도전한다는 생각에서 97년 ‘블랙잭’을 찍었는데 그것도 실패했다. 그때부터는 쭉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김산의 『아리랑』을 영화로 만들려고 준비했는데 8년을 끌다가 결국은 제작이 무산되기도 했다. 

▲ 2012년에 발표된 ‘부러진 화살’은 정지영의 건재를 확인시키며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13년 만에 어렵사리 만든 영화인데 다행히도 흥행에서도 대박이 났다. ‘부러진 화살’은 제작부터 개봉까지 에피소드도 많고 운도 따른 작품이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며 이것저것 모색하고 있을 때 배우 문성근 씨가 김명호 교수 석궁테러 사건의 공판기록을 담은 『부러진 화살』이라는 책을 읽어보라며 던져줬다. 성격이 별난 다혈질 교수가 벌인 충동적 사건으로만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완전 다른 이야기였다. 핵심은 사법부의 모순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곧바로 수감중인 김명호 교수를 찾아가 영화화를 허락해달라고 했더니,  다 공개된 사건인데 그냥 영화로 만들면 되지 뭘 허락을 받느냐고 하더라. 나중에 내용이 이상하면 자기가 고발하면 된다는 말을 덧붙이며. 하여튼 참 재밌는 분이다. 어쨌든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변호사 등 관련 인물들을 만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문제는 제작비였는데, 나의 주가도 영화의 내용도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고맙게도 명필름 이은 대표가 제작비를 투자해 줘 저예산 독립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주인공 김 교수 역을 소화할 배우는 아무리 봐도 안성기가 딱이었다. 그래서 안성기를 찾아가 두 가지를 이야기하며 출연 제의를 했다. 하나는 ‘남부군’이나 ‘하얀 전쟁’처럼 정치 사회적으로 껄끄러운 소재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을 했던 경험을 되짚어줬고, 둘째는 돈이 없으니 출연료는 영화가 흥행하면 나중에 지불하겠다는 거였다. 사실 어거지 제안인데 참 고맙게도 안성기 씨가 받아들였다. 안성기씨가 합류하며 영화 제작비도 2억원에서 5억원으로 늘어났고, 덕분에 영화의 외형적 완성도도 높아졌다. 

▲ 흥행 결과는 어땠나.
정지영이 오래간만에 영화를 들고 나오니 언론에서 호기심을 보여줬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일반시사회를 거치며 ‘의외로 재밌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배급사가 붙었다. 결과적으로 5억원을 들여 만든 영화에 400만 관객이 들었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영화 인생 처음으로 돈을 좀 벌었다. 안성기씨에게도 두둑히 출연료를 챙겨 줄 수 있어서 기뻤다. ‘부러진 화살’ 덕분에 다시 영화를 활발히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 ‘부러진 화살’ 이후 곧바로 찍은 영화가 ‘남영동 1985’다.
‘부러진 화살’이 개봉하던 해 연말에 김근태 의원이 사망했다. 예전부터 고문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김근태 전 의원의 수기 『남영동』을 읽고, 이걸 토대로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김근태 의원의 유족인 인재근 의원을 만나 영화화를 허락받은 후 원작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전작의 흥행 덕분에 여러 가지가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됐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큰 흥행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심 100만 명 정도 들었으면 했는데, 35만 명에서 멈췄다.

▲ 이후에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기획ㆍ제작하며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천안함 프로젝트’(감독 백승우)를 기획ㆍ제작했다. 이명박 정권이었으니 연이어 문제적 영화를 만드는 정지영을 당연히 불편하게 여겼다. 이후 투자가 다 막히는 것을 경험하며 확실히 찍혔구나, 느꼈다. 
 
▲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원조’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최근 문제가 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청문회에 참여한 모 국회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내 이름은 이미 MB 정권 시절부터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있었다더라. 사실 노무현 정부가 탄생할 때 문성근, 명계남, 이창동 등과 함께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결성해 지지 운동을 펼쳤는데,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 보니 좌장 역할을 했다. 그러니 정권이 바뀌고 가장 먼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것이다.

▲ 정지영 감독이 사회적인 문제에 목소리를 낸 건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영화일을 하면서 내내 사회적인 문제에 엮였다. 운동에 앞장서게 된 건 좀 우연이었다. 87년 6월항쟁 당시 전두환의 4·18 호헌조치를 철폐하라는 각계 각층의 성명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그런데 유독 영화계만 조용했다. 그래서 내가 한 술자리에서 영화인들도 목소리를 내자고 제안을 해 이틀 동안 100명이  넘는 영화인들의 서명을 받아냈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정지영은 좀 위험한 감독’ 이라는 꼬리표가 일찌감치 붙었다. 이후에 스크린쿼터 운동, 영화인회의 결성 등 사안이 생길 때마다 후배들이 나를 앞장세우곤 했다. 어쩔 수 없이  내 역할과 위치에 책임을 져야 했다.
 


▲ 윗세대 중에는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낸 선배들이 없었나.
이전 세대들은 대부분 정부의 지침에 따라 자기검열이 몸에 밴 세대였다. 그래서 87년의 영화인 선언이 영화계의 체질을 바꾼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나를 기준으로 구 영화인과 신 영화인을 가르는 기준이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이후에는 문화예술계에서 영화인들이 가장 앞장서서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 됐다. 사실 영화감독을 시작할 때 바랐던 삶은 영화만 열심히 만드는 좋은 감독이 되는 것이었는데, 살다 보니 한국 현대사가 사회 운동까지 요구하니 어쩌겠나.

▲ 결과적으로 한국영화 제2의 전성기를 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데.
사회의 개혁과 영화 산업의 변화를 위해 가장 전방에서 목소리를 내며 실질적인 열매들을 하나하나 얻어냈다. 그 결과 영화법 개정 투쟁 등의 성과로 제도적 개선이 이뤄졌다. 그러한 바탕에서 참신한 기획에 의해 제작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자본이 투자되면서 영화계에 활력이 찾아왔다. 소위 말하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다. 하지만 그런 시절에 나는 흥행 감독의 대열에서 밀려났다.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할 말이 없게 되는게 대중영화의 감독의 운명이니 어쩌겠나. 나는 과거는 깔끔하게 잊는 성격이다. 현재와 미래만 생각한다.

▲ 새로 제작한 영화 ‘직지코드’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어떤 영화인가. 
'직지코드'(감독 우광훈ㆍ데이빗 레드맨)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직지’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상당히 논쟁적인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영화를 통해 서양인이 쓴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구텐베르크가 진짜 인쇄술의 발명자인가 등의 질문을 강하게 던지고자 했다. 고려때 교황이 사절단을 보냈다는 교황청 문서보관소 자료도 새롭게 찾아내기도 했다. 학계에 파장을 일으킬 자신은 있는데, 대중들에게까지 파장이 확산될지는 모르겠다. 전주영화제에서 선을 보였는데 나름 반응이 좋았다. 더도 말고 흥행 스코어 10만 명만 기록했으면 좋겠다.

▲ 최근 영화의 다양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의 제작과 배급을 독점하며 중간 규모나 작은 영화들이 생존할 틈새가 없다고들 하는데.
무척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다. 대기업이 영화 산업을 수직계열화 하면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영화에만 투자한다. 당연히 그들은 돈이 목적이니까. 거대자본이 만드는 영화는 이런 내용에 이런 배우를 써야 한다는 매뉴얼이 고정돼 있다. 대중예술을 이렇게 접근해선 안된다. 길게 보면 함께 망하는 길이다. 영화가 다루는 소재, 영화가 겨냥하는 소구 대상, 제작비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이 함께 나와 줘야 건강한 산업 구조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미국은 독립 영화 시스템이 아주 잘 돼 있어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영화 시장에 새로운 인력과 감각을 늘 수혈한다. 그들로부터 견제 받고 영향을 받기 때문에 미국의 영화 산업이 단단한 위상을 지켜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그동안 영화와 비디오에 관한 법률을 바꾸려는 노력을 펼쳤는데 결과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영화 시장에서도 대기업의 독식을 막는 제도를 모색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 함께 활동하던 감독들 중 지금도 현장을 지키는 이가 있는가.
아쉽게도 없다. 사실 그래서 좀 외롭다. 외국에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깊이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영화인들이 많은데 한국은 산업환경 자체가 나이 먹으면 퇴출되는 분위기다. 나 역시 시나리오를 들고 투자자를 만나는 일이 참 불편하다. 젊은 실무자들이 어른 대우만 하면서 함께 소통하는 걸 꺼리기 때문이다. 예전에 활동하던 감독들이 다들 저마다 어디에선가 ‘차기 작품’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좀 주어졌으면 좋겠다.

▲ 평생 영화인으로 살아온 삶이 행복한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늘 흥미롭다. 나 개인은 무척 행복하지만, 아직은 이 사회가 불행하고 무엇보다도 내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겪게 한 게 미안하고 안타깝다.

▲ 고양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달라.
90년대 중반에 들어왔으니 고양시에 산 지 20년 가까이 됐다. 당시 ‘헐리우드키드의 생애’가 흥행에 실패하며 전세금을 다 털어먹고 갈 곳이 없게 되었는데, 고양시에 살던 누님이 산황동의 집을 내 주셨다. 그렇게 15년 가까이 누님 신세를 지며 살다가 ‘부러진 화살’의 흥행 성공으로 대장동에 내 인생에 처음 내 집을 장만하게 됐다. 마당도 있는 집이다.   

▲ 고양시가 어떤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는가.
고양시에는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교양 계층이 많다. 문화 정책을 잘만 펴면 대한민국의 으뜸 영상문화도시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문화 정책을 펼 때는 당장의 수익성을 따지면 안된다. 가까운 부천시의 장기적이고 파격적인 문화육성정책과 비교할 때 고양시의 문화에 대한 인식과 정책에 아쉬움이 많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박물관을 추진 중인데, 내 생각에는 고양시야말로 상암동과 파주영상도시를 잇는 중간에 위치해 최고의 입지와 조건을 갖춘 곳이다. 하지만 시정을 펴는 이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많이 아쉽다. 사실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의 조직위원장으로 위촉되어 조만간 사무실도 부천으로 옮길 계획이다. 

▲ 준비하고 있는 작품을 소개해달라.
하나는 사극인데, 조선 세조 때 함길도 변방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고, 또 하나는 무고한 이들이 살인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삼례수퍼 3인조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재심’과 맥락이 비슷하다. 살인사건과 재심이라는 무거운 소재지만, 아주 따뜻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누명을 쓴 주인공들이 진범들과 함께 서로를 보듬는 것이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둘 다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제작 시기를 조절하고 있다. 여기서 또 깨지면 안되니까 잘 되었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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