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누리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박준 시인과 금정굴 둘러보기

박준 시인과 함께 황룡산 금정굴을 찾은 독자들.

[고양신문]  “애도하고 추모한다는 것은 잘 슬퍼하고 잘 보내주기 위한 것입니다. 애도라는 과정을 잘 거쳐야 화해도 가능하고 다른 세계나 다른 세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특정 사건들에 대해 온전하게 이별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런 애도가 필요합니다.”

고양시민 20명이 지난 26일 오후 박준 시인과 함께 일산서구 황룡산에 있는 금정굴을 둘러봤다. 아람누리도서관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준비한 ‘도서관, 고양의 책 생태계를 잇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박 시인은 오전에 백석동 동네서점 ‘미스터버티고’에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후 독자들과 함께 금정굴을 방문했다.
 

아람누리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참가자들이 박준 시인과 함께 황룡산 입구에서 금정굴로 향하고 있다.

금정굴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200여 명의 민간인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고양경찰서장의 지휘 하에 재판 절차도 없이 집단학살을 당한 비극의 장소다.

1995년 유족들에 의해 발굴된 유해 153구는 서울대 시체해부실에 보관되었다가 2011년 고양시 청하공원에 임시 안치됐다. 이후 2014년에 고양동 하늘문공원으로 옮겨진 상황이다. 유족들은 ‘역사적인 진실을 규명하여 명예회복이 이뤄지고 용서와 화해의 시대를 열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와 유골이 발굴된 금정굴 현장 일대에 평화공원을 조성해 유해를 영구 안치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박준 시인은 2012년 발표한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통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다큐멘터리적인 묵직한 일상을 평범하고 사소한 것과 연관시켜 노래하는 신세대 젊은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박 시인은 이 시집에 실린 ‘기억하는 일’이라는 시의 주인공 ‘명자네 할머니’를 통해 금정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서기 양반, 이 집이 구십 년 된 집이예요 이런 집이 동네에 세 집 남았어 한 집은 주동현씨 집이고 한 집은 박래원씨 집인데 그이가 참 딱해 아들 이름이 상호인데 이민 가더니 소식이 끊겼어 걔가 어려서는 참 말 잘 듣고 똑똑했는데 내 자식은 어떻게 되냐고? 쟤가 내 큰아들인데 사구년 음 칠월 보름 생이야 이놈은 내 증손주야 (중략)”

이 시의 화자 명자네 할머니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동네 사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치매 환자다. 그런데 구청 직원이 할머니의 치매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할 때만큼은 제 정신이 돌아온다. “오래 전 사복을 입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고 시인은 시를 통해 말한다.

박 시인은 금정굴을 찾게 된 사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가까이 지내는 송종원 평론가와 이야기를 하다 ‘고양시 곳곳에 있는 음식점들을 찾아다니기도 하는데 50년, 60년 된 아픔의 장소를 못 찾아다니겠느냐’는 말이 나왔어요.”

정발산동에 살고 있는 박 시인은 금정굴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됐고, 이곳 이야기를 써보자고 결심하고 시를 쓰게 됐다고 한다.

 

황룡산 금정굴에서 희생의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행사 참가자들.


“일제시대에는 금광이라고 소문이 나서 황룡산 기슭에 수직굴을 팠어요. 그런데 금은 나오지 않았고 굴은 남았죠. 이 금정굴이 정치적인 이유로 50년 넘게 사람들의 기억 밖에 묻혀 있었어요. 2011년에는 금정굴 일대를 평화공원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한 사람이 고양시장이 됐고, 추모시설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금정굴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들려준 박시인은 참가자들에게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함께 슬퍼하고 기억하는 마음으로 둘러보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가한 권영란씨는 “일산 주민이 된 지 한 달밖에 안 돼 일산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면서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좋은 행사였다”고 의견을 말했다.

장항동에 산지 10년이 됐다는 이종미씨는 “금정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뭔가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는 굴인가 했는데 오늘 와 보고 깜짝 놀랐다. 이 프로그램을 만나지 않았으면 여전히 몰랐을 것”이라며 “생각의 영역이 확장되고 어두움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백석동 서점 '미스터버티고'에서 강연 중인 박준 시인.

아람누리도서관에서 개관 1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길위의 인문학’ 행사는 첫 회에 ‘소설가 김인숙 읽기’를 통해 김 작가와 서오릉 산책을 했고, 두 번째로 ‘시인 박준 읽기’를 통해 시인과 금정굴을 방문했다. 다음달 16일에는 ‘시인 신용목 읽기’가 진행되고 9월에는 황석영 소설가, 10월에는 문태준 시인, 11월에는 은희경 소설가 읽기가 연이어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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