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공연리뷰 : <제3회 고양국제무용제>

[고양신문] 벌써 세 돌을 맞는 고양국제무용제가 무더운 여름밤을 날려주는 시원한 청량제가 됐다. 8월 5일 저녁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은 공연을 보러 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그것도 순전히 민간 주도로 이뤄지는 국제무용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직은 규모도 작고 참가 단체들이 최상급의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대무용의 창의적이고 다양한 경향을 볼 수 있는 귀한 무대들이었다.

현대무용의 경향이 대개 그렇듯이 각 팀은 아무런 무대장치도 없이, 오브제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직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벌거벗은 무대에 단속적으로 숨을 죽이는 음악까지 거의 금욕적인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없는 검은 색의 무대 배경과 소박한 조명은 영국 팀의 '회상(Recollection)'이나 일본 팀의 '탄생(Birth)'처럼 명상에 가까운 작품들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때로는 어두운 무채색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단점도 있었다. 무용제에 참가한 한국, 미국, 영국, 필리핀, 일본 5개 국 6팀의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은 다양성의 무대였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여성 심리, 신데렐라(Cinderella EX4)
첫 작품 '신데렐라(Cinderella EX4)'는 김성용 안무가의 작품으로 남자 안무가의 눈에 비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진 젊은 여성들의 심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 작품에는 남성 안무가의 시니컬한 시선이 느껴져 여성 관객들은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네 명의 여성무용수들은 긴 막대를 잡고 때로는 간절하게, 때로는 다투면서 무언가를 잡으려고 한다. 긴 막대 즉 봉(棒)을 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여성들, 이를 잡으려고 안간힘 쓰는 여성, 여기서 ‘봉’을 동음이의어의 말장난으로 읽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마지막에 막대, 즉 봉은 무용수들이 떠난 무대 가운데로 홀로 던져진다. 바닥에 앉아 한 손을 내밀어 혹은 두 손을 모아 쥐며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여인들의 몸짓은 형이상학적인 대상의 희구라기보다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의 몸짓을 떠올리게 한다.

김성용의 'Cinderella EX4'

폭력과 상실, 울부짖는 여인들(Wailing Women) 
필리핀 이아 토라도(Ea Torrado)의 '울부짖는 여인들(Wailing Women)'은 폭력과 상실을 겪은 여인들의 울부짖음이다. 한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폭력이 지배할 때 가장 고통당하는 사람은 여성들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의 사라짐, 사방에서 들리는 분열된 목소리들, 범죄 혹은 공권력의 희생자를 위해 울부짖는 여성들, 범죄와 마약 등 필리핀의 어려운 현실에서 여인들의 슬픔과 고통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무대에서 실제로 울부짖는 무용수의 목소리는 처절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과 슬픔이 좀 더 몸의 언어로 표현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뮬러'를 생각해보면 몸짓으로 인간 내면의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Ea Torrado의 'Wailing Women'

정(靜)과 동(動)의 조화, 회상(Recollection)
영국의 '회상(Recollection)'은 한국 출신 안무가 조용민의 작품이다. 동서양 두 남성의 몸짓은 정(靜)과 동(動)의 조화와 깊이를 보여준다. 근육질의 서양 무용수의 움직임 앞에서 고요한 명상의 세계에 잠겨 있는 동양 남성의 식물성은 청량감으로 다가온다.

조용민의 '회상(Recollection)'

서정적인 몸짓의 언어, 풍경(Landscape)
춤추는 몸의 아름다움을 가장 춤답게 보여준 공연은 미국 도나 고프레도 머리(Donna Goffredo Murray)의 '풍경(Landscape)'이다. 두 여성무용수의 얽혔다가 떨어지고 다시 붙잡는 애틋하고 간절한 몸짓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동성애코드가 강하게 드러나는 사랑의 노래는 깊어가는 사랑의 절절함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Landscape'라는 시가 바탕이 됐다고 하는데 “이러한 풍경을 통해 그녀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 황금빛으로 물든 잔디밭이 넓은 공간을 통해 펼쳐져 있구나” 라는 시구의 서정성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구현된다.

Donna Goffredo Murray의 'The Dancers' Space-Landscape'

우주와의 비언어적 소통, 탄생(Birth)
일본 마리코 카키자키(Mariko Kakizaki)의 '탄생(Birth)'은 부토라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전위적인 현대무용 부토와의 친연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바닥에 엎드려 대지와 하나가 되고 대지에서 숨을 받아들이는 무용수의 몸은 ‘느림의 미학’이라고 부를 만큼 아주 느린 몸짓으로 서서히 열리면서 최초의 탄생을 보여준다. 시간이 멈춘 세계처럼 서서히 몸을 일으킨 무용수는 어느새 하늘을 향하고 우주와 소통을 꾀한다. 세계의 근원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우주와의 비언어적인 소통을 꾀하는 부토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춤이었다.

Mariko Kakizaki의 'Birth'

경쾌한 발레, 질문 있습니다(I have a question)
마지막으로 한국 김순정의 '질문 있습니다(I have a question)'는 참가작 가운데 유일한 발레 작품으로, 현대무용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토우슈즈의 마찰음이 오히려 낯설게 들렸다. 어린 소녀들의 경쾌하고 발랄한 춤, 기량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춤이었다.

김순정의 '질문있습니다(l have a question)'

이번 무용제를 주최한 고양안무가협회 임미경 회장은 "고양국제무용제가 3회를 맞아 한층 성숙된 무대를 선보였다는 관람평이 많아 뿌듯하다"며 "객석을 채운 고양시민의 관람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며 만족해 했다. 이어 "고양국제무용제에 참가했던 외국 무용수들도 만족도가 높아 벌써부터 내년 출전팀을 추천하고 있다"며 "내년엔 무용수들이 공연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이틀(1일 1회 공연)에 걸쳐 축제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장 원초적인 재료인 인간의 ‘몸’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춤은 나라와 인종을 초월한다. 그러나 표현 내용은 역시 각자가 처한 사회의 문화와 지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번 무용제 참가단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섯 나라의 춤꾼들이 함께 이뤄나가는 협업과 교류의 장인 제3회 고양국제무용제는 다양성과 함께 앞으로의 발전을 더욱 기대하게 하는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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