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첩보영화의 고전은 007 시리즈이다. 주인공 제임스 본드(James Bond)는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의 작품에 나오는 영국첩보원이다. 영화로는 1962년에 첫 작품이 나왔고, 이미 24편이나 제작됐다. 2019년에 25번째 작품이 나온다고 하니 고전 중에 고전이다. 냉정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선명한 적과 아로 나눠지면서, 온갖 첨단무기와 수퍼카,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본드걸이 눈요깃거리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007 시리즈보다는 본 시리즈의 영화가 친숙할 것이다. 주인공 이름이 제이슨 본인데, 007 영화의 제임스 본드와 묘하게 중첩된다. 본 시리즈에서는 적과 아의 구분이 불분명하며, 첨단무기도 등장하지 않고, 주변에 물건이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특징이다.

본드는 적과 아가 분명하여 내면적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데, 본은 적과 아가 불분명하여 항상 내면적 갈등을 겪는다. 본드는 선명한 적과 싸우지만, 본은 적이 누군지 모른다. 본드는 적을 망설임 없이 죽이지만, 본은 죽일 때조차 망설이고, 죽이지 않기도 한다. 본드는 이념에 충실한 인물이지만, 본은 이념이 불분명하다. 아니 오히려 애국이라는 이념을 의심한다. 본드는 사과와 반성이 없다. 본은 자신이 죽인 사람의 가족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한다. 본드는 잘 생긴 외모로 여성을 유혹하지만, 본은 평범한 외모로 그 흔한 섹스씬도 없다. 본드는 외부의 적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지만, 본은 도피를 위하여 외국에 있다가 자국으로 잠입한다. 본드는 외향적 존재지만, 본은 내향적 존재다.

이렇게 장황하게 본드와 본을 비교하는 것은 냉전시대적 인물과 탈냉전시대 인물의 특징을 두 시리즈가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의 민주주의는 외부의 공산주의와 싸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정립하지만, 탈냉전시대의 민주주의는 인권에 반하는 내부의 반민주주의와 싸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전자의 민주주의는 국가주의의 변형이지만, 후자의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의 변형이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인간과 전체에 의해 희생당하는 개인이 대립된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 새롭게 부각된다.

살인무기로 키워진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본드와 살인무기로 키워진 자신을 회의하는 본은 하늘과 땅 차이다. 본에게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적은 내부의 곳곳에서 작동한다. 본을 죽이려는 자들은 적이 아니라 동지라 믿었던 자들이다. 매번 고비마다 본은 아군(?)과 싸운다. 그런 의미에서 본은 각성하는 인간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근원을 찾아가는 이 힘든 싸움을 본은 목숨을 걸고 진행시켜 나간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북한과 적대함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반민주주의를 구축했던 적폐들과의 싸움을 통해 진전된다. 적폐세력은 뿌리가 깊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북한도 이용했다. 자신이 위기가 있을 때마다 외부에 적을 만들어 관심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 그들의 특기다. 전쟁위기로 위협하고, 갈등 조장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린다. 미국의 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이 하고 있는 행동이 바로 그런 예이다. 전 세계는 탈냉전으로 가버렸는데, 한반도와 미국만 냉전이다. 아,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 현상이냐.

냉전이 강화될수록 반민주세력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모든 적폐가 은폐되고, 국민의 관심이 외부로 향하기 때문이다. 현혹되지 말자. 우리의 당면과제는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다. 지금은 본드가 아니라 본이 활동할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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