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전 건국대 교수

[고양신문] 고려 말 보조국사의 법통을 이어 받아 송광사의 2대 조사가 된 진각국사(1178∼1234) 혜심(慧諶)의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 속명은 식(寔)이고,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어머니가 벼락을 맞는 태몽과 함께 하늘 문(天門)이 세 번 열리는 꿈을 꾸고 난 다음 그를 낳았다. 

어려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출가하기를 청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고 유학(儒學)에 힘쓰라 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해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때 혜심이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었는데, 부처와 보살들이 나타나는 꿈에서 깨자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이듬해 어머니가 별세하자, 당시 조계산(曹溪山)에 수선사(修禪社, 현 송광사)를 창건해 사람들을 크게 교화시키고 있던 초대 국사 지눌(知訥)에게 나아가 그의 제자가 됐다. 전날 밤 지눌은 설두중현선사가 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상히 여겼는데 혜심이 찾아왔으므로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혜심이 밤, 낮을 가리지 않는 고행과 정진으로 선정(禪定)을 이루자, 지눌은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며 기뻐했다.

1208년 지눌이 혜심에게 수선사의 사주(社主) 자리를 물려주려하자, 혜심은 그 자리를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마지못해 수선사로 돌아가, 그의 고원한 선문(禪門)을 일반백성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법설을 펼쳤다. 이 때 혜심의 화두는 “여보게 부처가 되는 걸 어렵게 생각 마시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일세”였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말처럼 보이지만, 천국도 지옥도 모두가 마음속에 있는 법. 시공을 초월해 이보다 더한 진리의 고언이 또 어디 있겠는가. 1213년 고종(高宗)이 왕위에 올라 혜심에게 선사를 제수하고 다시 대선사(大禪師)로 올렸다. 혜심을 수차례 왕의 부름을  사양하며 홀로 산속에 묻혀 고려 선가(禪家)의 위상을 지키는 데 만족했다.

1234년 여름 혜심은 제자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탁한 뒤 마곡(麻谷)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고 말한 후 빙그레 웃으며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했다. 고종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하였다. 부도는 그가 생전에 『선문염송했拈頌)』을 집필했던 송광사 광원암 북쪽에,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는 전라남도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한치의 양보나 배려도 없이 아수라장 같은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오늘의 세태를 만약 진각국사께서 보신다면 과연 무슨 법어를 내리실까. “여보게 제발 자비롭게 살게나….” 그의 음성이 귓전에 울려오고 있는 듯하다.

※설두중현선사 : 송(宋)나라 때의 고승(高僧)으로 불교대중화에 기여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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