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이 전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인터뷰

[고양신문] 총 476명의 탑승객 중 306명 사망. 온 국민을 슬픔과 충격에 빠뜨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도 어느덧 4주년을 향해가고 있다. 시민들의 촛불로 참사 주범이었던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고 새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까지 세월호 참사 원인에 대한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건에 대한 진실뿐 아니라 참사 당일 전원구조라는 오보와 유가족들에 대한 악의적 유언비어, 언론의 허위·왜곡 보도 등의 문제점들은 여전히 밝혀져야 할 사안이다.

지난 8월 4・16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가 발간한 『세월호 팩트체크』라는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 그리고 앞으로 밝혀야 할 것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은 전 세월호특조위 조사관이자 고양시민이기도 한 김진이 국조위 상임연구원. 전 고양신문 편집장인 그가 세월호 특조위에서 밝혀내려고 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22일 원당행복학습관에서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특조위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조사관 모집 당시 언론조사분야를 따로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관심이 생겼다. 언론의 적정성과 명예훼손에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그 전까지의 조사위에서는 없던 분야였다. 세월호 보도내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차에 ‘뭔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 고민 끝에 지원하게 됐다.

면접자리에 가보니 언론홍보와 언론조사 두 가지 분야가 있었다. 무조건 언론조사 쪽으로 일해보고 싶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난 기자들과 친하지 않기 때문에 홍보 일은 못한다고...(웃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어필하지 않았으면 홍보 쪽에 들어갈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조사 분야 일이 나와 맞았고 잘 된 거라고 생각한다.

 

주로 다뤘던 문제들은 어떤 것이었나.

그동안 언론들이 다뤘던 세월호 보도에 대한 공정성과 적정성, 그리고 명예훼손에 대한 조사였다. 기록업무도 있었는데 그쪽은 파견공무원이 주로 맡았고 나는 전적으로 조사업무를 담당했다. 그 전까지 나왔던 언론보도들을 검토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에 돌아다니는 출처 불명확한 악의적 내용들에 대한 부분까지 조사를 확장해갔다.

 

말씀대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명예훼손 문제가 유독 심했던 것 같다.

특조위가 중요하게 검토했던 사안이다. 7월 30일 첫 출근 당시 생존학생 특례입학 건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문제가 있었다. 나중에는 각 대학 대나무숲 사이트에 단원고 출신 학생을 색출해야 한다는 그런 글까지 올라오더라. 이런 내용들에 대한 불법성 등을 판단하고 출처를 파악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글뿐만 아니라 영상 같은 것들도 심각한 내용들이 많았다.

여기에 일정한 패턴이 있었는데 여당(당시 새누리당)의원이 한마디를 하면 그게 보도가 되고 내용이 부풀려져서 SNS에 퍼지고 다시 그 의혹을 가지고 의원이 이야기하는 그런 식이었다. 구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빅데이터 전문분석기관에 용역을 맡겨보니 1명의 이른바 '조장' 계정에서 유가족 폄훼나 특별법 제정 반대 글을 올리면 다른 수십 개 '조원' 계정에서 일제히 리트윗하는 경향을 발견했다. 모 보수단체 임원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나중에 2기 특조위가 출범하면 조직적 개입의 정황과 자금출처까지도 밝혀내야 할 사안이라고 본다.

 

언론부분과 관련해서는 어떤 문제들을 주로 다뤘나.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오보들을 조사했다. 약 30건이 접수됐는데 가장 큰 건은 참사 초기 전원구조와 구조작업 총력동원 같은, 사실과 다른 보도들이었고 그 밖에 언론통제 정황과 유병언 관련 보도들이었다. 주로 신청사건이 개별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분리병합하고 시간대별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오보도 문제였지만 참사 이후 며칠 사이에 유병언에 대해 집중적 보도가 이뤄지는 등 국면전환을 시도하는 모습이 있었다. 여기에는 정부의 언론통제와 지침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진상규명을 위해 당시 KBS, MBC 등의 간부들에 대해 출석요구를 했지만 이뤄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세월호 진상규명에서 언론조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반 시민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참사 당시 가라앉는 배의 모습, 그리고 자막으로 떠있는 전원구조라는 오보였을 것이다. 언론이 모두를 목격자로 만들고 온 국민을 트라우마에 빠지게 했다. 참사 초기뿐만 아니라 이후 과정에서도 오보수준이 심각했고 명예훼손도 범죄수준이었다.

당시 현장기자들은 이 문제가 언론사들의 난립으로 인한 어뷰징 경쟁 때문이었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전부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보도경쟁이 심해 확인되지 않은 내용들이 나간다고 해도 어떻게 모든 언론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오보를 내는 일이 가능하겠나. 실제로 현장에 있던 목포MBC 기자가 전원구조가 아닐 수 있다는 내용을 보냈음에도 윗선에서 묵살된 사실이 확인됐다. 현장상황이 중간과정에서 왜곡된 것이다. 때문에 참사초기 어떤 절차에 의해 최초보도가 이뤄졌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야 한다.

 

세월호 팩트체크라는 책이 나왔다.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됐나.

1기 특조위가 정부에 의해 사실상 강제 해산당했지만 일부 남은 조사관들은 계속 업무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올해 초 4・16세월호 국민조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 시민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이어나가면서 부족하나마 그동안 밝혀낸 진상내용을 알린다는 생각으로 대중서적으로 책을 내게 됐다. 새로 쓴 내용이라기보다는 상임연구원 모임에서 함께 공부했던 내용들을 나눠서 원고로 정리한 거라고 보면 된다.

 

1기 특조위가 종료됐음에도 남아서 조사활동을 지속했던 이유가 궁금하다.

돌이켜보면 너무 아쉬웠던 조사활동이었다. 이관받은 자료만 몇십 테라에 달하다보니 언론조사라는 내가 맡은 업무에만 기계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다보니 세월호 사건에 대해 제3자적 관점으로만 바라봤던 것 같다.

1, 2차 청문회를 거치면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됐다. 재판자료, 진술서, 포랜식 자료들을 다시 보면서 세월호는 원인, 언론, 은폐, 피해자가 각각이 아니라 다 연결된 하나의 참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유가족들의 이야기 속에 진실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강제종료기간이 가까워짐에도 더 열을 내고 조사하고 그랬다. 컴퓨터, 책상을 들어낼 때까지 남았던 것도 무언가 하고 싶다는 오기 때문이었고 해산 이후 국민조사위 참여도 그렇게 하게 됐다.

 

2기 특조위 출범을 위한 ‘사회적 참사법’이 이번에 국회에서 통과됐다. 특조위 활동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보는지.

1기 특조위 활동엔 온갖 방해들이 많았다. 정부에서 온 파견공무원들은 거의 업무해태수준이었고 여당 추천 위원들은 매번 정치싸움만 일으키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게다가 예산도 많이 깎인 상황이라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특조위가 다뤄야 할 290건 중에 1건에 대해서만 보고서가 나왔다. 결론적으로 1기 특조위는 사실상 한 게 없는 셈이다. 다만 해결해야 될 과제들은 남긴 만큼 2기 특조위에서는 시행착오 없이 진상규명에 나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적어도 유가족들, 그리고 시민들에게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답할 수 있는 특조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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