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연말이다. 예전에는 거리마다 캐롤송이 울려 퍼지는 시기지만, 지금은 거리가 한산하다. 경제가 아직 안 풀린 모양이다. 연말이 되면 나는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모르시는 분을 위해 간략히 요약하여 소개하자면, 한 포도밭 주인이 포도를 딸 시기가 와서 거리에 나가 일꾼을 모았다. 하루 일당 10만원을 주기로 한다. 일손이 부족했는지 점심때쯤 다시 나가 일꾼을 더 모은다. 그리고 저녁때쯤 한 차례 더 나가 일꾼을 더 찾았다. 수확이 끝나자, 일꾼들을 모아놓고 일당을 주는데, 모두 똑같이 10만원을 지불했다. 그러자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은 아침부터 열심히 일했고, 다른 사람들은 적게 일했는데 왜 일당이 같으냐고. 주인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약속한 일당 10만원을 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얼마를 주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일꾼들이 보기에는 주인의 셈법이 어리석지만, 주인의 셈법은 지혜롭다. 나중에 일한 일꾼들도 그 10만원이 필요했을 테니까. 교환과 거래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선물의 논리다. 선물은 일한 만큼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한 만큼 주는 것이다. 선물을 주는 자의 마음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쁨을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는 것이다.

뇌물과 선물은 그렇게 다르다. 뇌물은 철저한 계산속으로 주는 것이다. 주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을 얻고자 주는 것이 뇌물이다. 뼛속까지 자본주의적이다. 그러나 선물은 그렇지 않다. 사랑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선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마음이 담겨있기에 그 선물은 예사 물건이 아닌 게 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예(禮)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 선물의 마음을 공자는 인(仁)이라 했다. 사랑이다. 그러니까 공자는 백성을 권력이나 폭력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베풂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원했다. 그 사랑의 마음이 베풂으로 나타날 때, 백성은 저절로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것을 공자는 충(忠)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충은 학교나 군대에서 훈련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선물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접근이다.

태고사회를 비교분석한 마르셀 모스는 ‘선물론’에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주는 물건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선물을 주는 것은 단지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영혼을 함께 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은 과시적 잔치나 선물주기(포틀라치)를 통해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태고사회 사람들의 선물은 폐쇄적이 아니라 순환적이다. 끼리끼리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고 주는 것의 연속이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한다. 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려한다. 이 사회의 부모들인 기성세대들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주려는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덜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려는가? 주려한다면, 찔끔찔끔 주지 말고 화끈하게 주자. 다음 세대가 그 다음 세대에게 더 화끈하게 줄 수 있도록. 그 화끈한 선물의 사회제도적 표현이 직접세의 강화이며, 부유세의 신설이고, 상속세의 확대이다. 시급 일만원이며, 보편적 기본소득의 확립이다.

선물의 계절,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물질화하여 영혼을 잃어버린 우리를 슬퍼한다. 태고사회 부족장의 과시적 선물주기를 그리워한다. 가진 자들의 격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