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와 더불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배경음악으로 딱이다.

나는 박정희 시대에 태어나 국민교육헌장을 못 외워 학교에 남아야 했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생각도 무르익기 전에 매일 국기가 내려올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멈춰 서야했던 세대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영화관에 가면 멀쩡히 앉아있다가도 애국가가 울리면 일어서야 했고, 정부의 홍보영상인 ‘대한 늬우스’를 보며 애국심을 불태웠던 세대다.

초등학교(당시로는 국민학교) 시절, 멸공포스터로 교내 최고상을 받아서 상장을 들고 집으로 달려가 부모님께 자랑을 하기까지 했다. 내가 부끄럽냐고? 아니 나는 나를 그렇게밖에 못 키운 이 사회가 부끄럽다. 누군가를 미워하려면 그에 합당한 자신의 체험과 판단이 있어야 했는데, 이 나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보다는 증오를 먼저 배우게 했으며, 가장 크게 증오를 표현하는 아이를 칭찬하는 정신이상적 전체주의적 사회였다.

지금도 전체주의를 그리워하는 정신이상 상태에 빠져있는 분들이 상당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지만 부끄러운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려는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증오와 무지를 조장하는 언론들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 정신이상적 전체주의를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민주주의의 근육을 키우는 일뿐이다.

그래서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미래세대를 위한 방책부터 마련할 일이다. 그 현장은 당연히 학교가 되어야겠지. 학교야말로 정신이상적 전체주의에 맞서 건전한 민주주의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민주주의의 시작은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럼 어쩔 것인가? 학교가 민주주의의 산실로 거듭나야 한다. 학교의 구조와 운영이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생님들의 각성이다. 교사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가? 학생을 단순히 피교육자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국민을 지배하고 관리해야할 대상으로 여겼던 전체주의자들과 관료주의자들의 태도이다.

학생은 관리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근본주체이다. 그들이 민주주의자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학교의 본분이다. 그래서 학교의 근본주인은 학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장과 교사와 학생 중 무엇이 가장 귀한가? 학생이 가장 귀하고, 교사가 그 다음이며, 교장은 가장 낮다. 학교가 잘못되면 교장을 갈아치워야지, 학생들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찍이 맹자가 민본주의를 주장했던 정신은 오늘날 학생근본주의로 거듭나야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이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학교인가? 학생들과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하며 학교의 정책을 학생중심으로 개혁하고 있는가? 미래사회를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학생들이 성장하고 있는가? 성적이 아니라 인격으로 학생을 대하고 있는가?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학교는 온전히 구현하고 있는가? 이 오래된 근본 질문들을 교사들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오고 졸업생들은 졸업장을 받을 것이다. ‘빛나는 졸업장’은 종이쪼가리에 금박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빛나길 소망한다. 신입생들의 환한 얼굴은 비비크림의 효과가 아니라, 삶의 주인공으로, 민주주의자로 성장하면서 생겨나는 내면의 환한 빛이었으면 좋겠다. 민주주의가 학교에서부터 ‘만세’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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