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의 역사인물 기행>

최재호 전 건국대 교수, 고봉역사문화연구소장

[고양신문] 조선 중기 청백리이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에 참전한 영웅으로 정무공신에 올랐던 최진립(崔震立, 1568년~1636년) 장군은 이른바 ‘경주 최부자집’ 가문의 원조이기도 하다. 지난 400여 년간 무려 12대에 걸친 만석꾼의 부(富)와 9대 진사를 배출하며, '청부(淸富)'의 대명사이자, 진정한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으로 집안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무인으로서의 그의 활약상은 다소 낮게 알려진 느낌마저 없지 않다.

장군은 최치원의 17대 손으로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 황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이다. 본관은 경주이나 후손들에 의해 분관되어 현재 월성(月城) 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그는 나이 25세이던 195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대를 조직해 언양, 영천성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이듬해에 무과에 급제해 군자감의 부정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관직을 사양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 수백 명을 인솔해 울산의 서생포(西生浦) 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加騰淸正)가 이끄는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어서 당시 도원수 권율(權慄)과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합세해 벌어진 태화강변의 도산(島山, 울산왜성)전투에서, 그는 높은 고지에 올라 적을 유인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적군의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최진립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경흥부사,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다.

임진왜란의 악몽을 겪은 지 불과 45년이 지난 1636년 병자년, 청 태종이 10대군을 이끌고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조정은 부랴부랴 각 도에 공문을 보내 임금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한양에서 가까운 충청도 관군이 가장 먼저 북으로 달려갔고, 최진립 역시 69세의 노구였지만 공주영장의 자격으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아군의 총 지휘관이던 충청감사 정세규가 '늙어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고 만류하자, 그는 "내가 늙어 싸움에 이길 수는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637년 1월 2일, 드디어 청나라 군사와 용인근처 험천(險川)에서 대치하게 됐다. 최진립의 군사는 청군을 맞아 병력이나 무기의 열세에도 불고하고 하루 종일 10여 차례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바닥이 났고, 병력도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는 자신을 따라온 두 노비 ‘옥동’, ‘기별’에게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보존하라고 일렀으나,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저희가 충노(忠奴)가 되지 못하리오”라며 돌아가기를 거절했다. 이듬해 시신을 수습 했을 때 최진립 장군과 두 노비의 몸에는 총알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경주시 내남면에 위치한 충의공원 내 최진립 장군의 동상 뒷면에는 그들 노비의 모습이 양각돼 있다. 또한 장군의 후손들은 지금도 매년 음력 12월 27일, 장군의 제일(祭日)에 당시 장군과 운명을 같이한 노비 두 분을 함께 제향하고 있다고 한다. 청년시절엔 의병으로, 노년엔 장군으로, 국난(國難)이 있을 때마다 나이를 잊고 전장으로 뛰어나가 조국에 몸을 바친 영웅, 또한 주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노비의 용기, 바로 이런 것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은 아닐까.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되새겨 보고픈 진정한 역사인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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