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화재안전연구소 소장

[고양신문] 토요일 새벽,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운동을 나섰다. 공기가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하다. 오랜 더위 탓에 아무 생각 없이 반팔에 반바지로 문을 나선 게 후회스럽다. 돌이켜 보면 올 여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심한 가마솥 찜통더위를 겪어내야 했다. 그것이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기후변화의 탓인지, 북태평양 고기압이 확장하며 기승을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민들은 전기요금이 무서워 에어컨도 제대로 켜지 못하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부지기수였다. 이제 폭염은 다양한 계절 중 하나의 서정적인 모습이 아닌 재난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듯하다.

폭염과 열대야가 오랜 기간 지속되고 온열질환과 그에 따른 사망자가 속출하자 정부는 한시적인 전기요금 완화방안을 마련했다. 누진제가 적용되고 있는 주거용 전기요금 단가를 일부 조정했다. 하지만 이게 우리 국민에게 얼마만큼의 혜택으로 와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기간 일본에선 ‘No 절전’ 캠페인을 벌였다. 국민들이 열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전기를 아끼지 말고 에어컨을 켜라는 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태 여파로 전력사정이 여의치 않은 나라에서 이게 가능한 일일까?

1970년대 유류파동을 겪으며 일본도 전기요금 누진제를 도입했다. 요금을 사용량에 따라 3단계로 나눴지만 누진율은 1.5배 수준이었다. 우리도 지금은 3단계의 누진제를 적용하지만 누진율은 3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정용에만 6단계, 누진율 11.7배까지 달한 것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도 전력 사용이 크게 증가하는 하절기와 동절기에 많이 사용하는 사용자에게는 훨씬 높은 단가를 적용해 혹서기와 혹한기에는 전기요금이 7~8배로 뛸 수도 있다. 우리 국민이 에너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일본과 우리 사이에는 에너지 수급체계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일본은 2016년 전력 소매시장을 전면 자유화했다. 누구나 전기를 만들어 전력 소매시장에 뛰어들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전력회사가 생겨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전기요금도 내려갔다. 우리도 민영화를 전제로 전력산업 구조조정을 시도한 바 있지만,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기본 틀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에너지 수급체계와 요금, 세제와 관련된 모든 것을 중앙정부와 전국 규모의 공기업들이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현 정부가 표방하는 참여형 에너지 체제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사실 과거 중앙정부 주도의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급격한 수요를 충당하기에 지금과 같은 중앙집중식 에너지 수급체계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역별 차이가 큰 에너지 수급환경을 중앙정부와 전국단위 에너지 공기업이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건 애당초 무리다. 지자체가 에너지 수급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지금의 지자체가 그럴만한 역량을 갖고 있는 걸까. 현재 전국적으로 에너지 관련 부서가 설치된 광역자치단체는 11개, 기초자치단체는 9곳에 불과하다 한다. 고양시에서도 지역경제과의 일부 업무에 불과한 듯하다.

교통이나 문화적 환경이 다르듯 에너지 수급환경도 지역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수요는 적으면서 에너지자원이 풍부한 지역이 있는 반면, 대도시와 같이 수요는 매우 크지만 자급률은 제로에 가까운 지역도 있다. 그럼에도 소비하는 에너지 비용은 전국 어디서나 같은 수준으로 부담한다. 에너지자원이 풍부한 지역은 저렴한 비용을 부담하고, 부족한 지역에서는 더 비싼 요금을 내는 게 마땅하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교통 등 다른 모든 자원은 대도시에 집중돼 혜택을 보고 있음에도, 에너지는 공평하게 나눠쓰자는 건 너무나 불공평한 처사다.

지자체는 해당 지역이 갖고 있는 에너지자원의 이용이 극대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먼저 에너지자원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이를 적극 개발하고 전략산업화 함으로써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 반면 별다른 에너지자원 없이 수요가 큰 지역에서는 먼저 효율을 높여 절대적 수요를 줄이는 한편, 수요의 충당에 요구되는 공급은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대규모 에너지 소비시설은 해당지역의 에너지 수급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각종 시설의 인허가 시에 에너지 수급상황도 면밀히 살펴야 한다.

전국 모든 지역의 에너지 수급사정을 중앙정부와 전국 규모의 공기업이 알 수가 없다. 해당 지역의 에너지 수급에 관한 사항은 지자체 주도로 계획, 운영 및 관리돼야 마땅하다. 지자체의 에너지 정책이 중앙정부와 판박이어서는 안되며, 에너지 대책에 지자체가 적극 나서야 할 이유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