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에서 탁월자들이 지배하는 귀족사회를 꿈꾼 바 있다. 사회구성원을 세 계급으로 나누고, 지혜로운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용감한 군인은 나라를 수호하고, 욕망덩어리인 노동자들은 절제를 배우며 최하층에서 일하는 사회를 구성하였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비전문가들의 집단인 민중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민주주의를 혐오하였다. 그러한 그의 생각은 당대 귀족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역사상 매우 드문 사례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테네의 민주주의 역시 불구의 것이었다. 기초 경제를 책임지는 노예들(오늘날의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의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노동을 짐승과 같은 노동(aminal laborans)이라고 규정하고 생존을 위한 노동을 좋은 삶에서 제외시켰다. 가정경제(oikos)를 책임지는 여성 역시 민주주의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노동을 책임지는 노예노동자와 여성을 제외한 민주주의를 과연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노동해방을 실현한 시민만의 민주주의를 과연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이제 민주주의는 인류사회의 대세적인 이념이 되었고, 문명국가라면 그것이 자본주의사회이든 공산주의사회이든 민주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표방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는 이렇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에 따른다면 대한민국의 국민은 누구나 권력의 주권자이다.

민주와 공화의 이념은 인류가 지금껏 진화해 오면서 애써 쟁취한 것이었다. 그 오랜 왕정을 종식시키고, 그 참혹한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며 피와 땀으로 얻어낸 소중한 이념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형식상으로는 삼권이 분립되고, 시민참정의 원칙이 지켜지는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 그럼 된 것인가?

우리는 민주주의의 겉옷을 입었으나, 우리의 몸은 민주주의를 체화하지 못하였다. 민주주의는 선거판이나 국회에서나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거리와 시장에서, 농촌과 도시에서, 노숙자에서 대통령까지 민주주의의 원리가 흘러 넘쳐야 한다. 나는 이를 ‘심층민주주의’라고 표현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자신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이념과 제도의 차원을 넘어 삶과 태도의 차원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러한 심층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변화해야할 곳은 학교이다. 초중고 12년의 교육은 민주주의자를 양성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자는 주민등록증이 생기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권력의 주권자로 성장해야 한다. 따라서 학교 교육의 제 1목표는 민주주의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시행되어야할 것이 학생을 학교운영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다. 교사, 학부모와 함께 학생들이 동등한 학교운영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입장을 모으고, 토론하고, 합의하고, 결정하고, 실행하고, 점검하고, 교정하는 일체의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과 함께 하는 민주적 동반자가 되어, 그들이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 역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내신과 수능 대신 민주와 공화를 선택하라! 뼛속까지 민주주의자가 되라! 학교에서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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