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개처럼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개는 벌지 않는다. 그날그날을 어슬렁대며 살아갈 뿐.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소유하지 않는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소유하느라 평생을 보낸다. 소유하느라 소요하지 못한다. 얼마를 버느냐가 삶의 척도라니, 개도 웃을 일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놈의 소유를 위해 죽도록 고생한다. 초중고 12년을 죽도록 공부하는 이유도, 명문대학에 입학하려는 이유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이유도 모두 소유를 위해서다. 적게 소유한 자는 많이 소유한 자를 부러워한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일하느라 놀지도 못한다. 퇴근시간이 지나도 상사 눈치 보느라 퇴근도 못하고, 설령 퇴근했더라도 쉬지도 못한다. 쉬는 것도 다음날 일하기 위해서 쉰다. 이 정도면 소유의 노예다.

설령 논다해도 소비적으로 논다. 소비는 소유의 다른 면이다. 좋은 상품을 구입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장소를 돌아다니며 소비(소유)한다. 삶의 과정은 모두 소유나 소비로 귀착된다. 과정은 고달프고 힘들어도 결과만 좋은 그만이다. 결과는 결국 소유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집, 좋은 물건……. ‘좋다’의 기준도 결국 소유다. 게임의 아이템이든, 구매의 영수증이든, 졸업증명서나 결혼증명서든, 집문서나 땅문서든.

그러나 영원한 소유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원하지 못한 자가 소유를 추구하는 것은 진정 어리석은 일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우리는 결국 무일푼에서 시작해서 무일푼으로 돌아갈 뿐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서 앙상하게 마른 몸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다. 그러니 삶의 척도를 바꿀 일이다.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서 ‘얼마나 잘 놀고 있느냐’로. 소유(所有)에서 소요(逍遙)로!

일찍이 견유(犬儒)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주했을 때, 알렉산드로스가 “그대는 무엇을 갖고 싶은가”라고 물었을 때, “비키시오. 태양을 가리지나 마시고!”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까닭은, 디오게네스의 삶이 소유가 아니라 소요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것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갖기를 원하지 않는 자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처럼 살았던 디오게네스의 소요가 알렉산드로스의 소유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삶은 대지의 어머니 지구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그러니 이제 소유의 강박에서 벗어나 증여의 놀이를 시작하자.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넘쳐나는 샘물처럼, 비워있기에 채워지는 술잔처럼, 소유와 이별하고 소요를 맞이하자. 소유의 질주를 멈추고, 소요의 어슬렁거림을 배우자. 디오게네스처럼 작은 등불이라도 들고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지혜의 선물을 나눠주자. 삶의 본질은 소유가 아니라 소요라고.

연말연시는 소유의 기간이 아니라 선물의 기간이다.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기간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주기위해 주변을 살피는 기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present) 또한 죽은 자들이 간절히 살기 원했던 선물(present)와 같은 것이다. 선물은 주기 위해 존재하지 갖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 온전히 줌으로써 실현되는 무엇이다.

12월, 낡은 마음의 양말을 걸어놓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 양말을 채워주는 산타의 기간이 되기를. 지금 거리에서, 굴뚝에서, 텐트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소리치는 사람에게 즐거운 웃음의 선물이 전달되기를.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들이 따뜻하게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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