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어릴 적,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중학교에 입학하고서 어머니는 어디서 헐값에 나왔다며 과일가게를 인수하셨다. 아버지는 산업역군으로 해외에 나가 외화벌이를 할 때였다. 아버지가 고생하시는데 같이 노력해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인지, 아니면 소일거리를 찾으셨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제개념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으신 어머니는 며칠 가게를 맡으시더니, 얼마 못가 학교를 끝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가게를 맡기셨다. 오호 통제라. 경제개념이 없기로는 어머니나 나나 순위를 매길 수 없는 지경이어서, 가게에 앉아 만화나 뒤척이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 시큰퉁한 표정으로 가격을 말해주고는 다시 만화로 눈을 돌렸다. 그러니 장사가 잘 될 리 만무. 예쁜 동네 여자애가 오면 듬뿍 얹어주고, 어른이 오면 쌀쌀맞게 굴었다.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즐거웠던 일은 심심하면 다양한 사과를 맛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껍질과 과육이 단단하지만 단맛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국광이며, 얇은 껍질에 콕 쏘는 상큼함을 느낄 수 있는 홍옥, 노란색 껍질에 이국적인 맛을 냈던 골덴, 연두빛 껍질의 풋사과는 크기도 작지만 단맛도 덜했다. 뭐니뭐니해도 사과의 왕은 부사였다. 값도 제일 비쌌고, 크기며 당도도 다른 사과보다 월등했다. 다른 사과에 손대는 것은 모른 척 눈감아주셨지만 부사는 쉽게 먹을 수 없었다.

그러면 뭐하는가. 과일도 유통기간이라는 것이 있어, 신선도가 떨어지면 더 이상 상품으로 팔 수 없었다. 그렇게 상품성이 떨어지는 사과를 어머니와 나는 일일이 껍질을 깎고 잘게 잘라 사과쨈을 만들었다, 사과쨈을 만드는 날은 가게가 온통 달콤한 냄새로 진동했다. 커다란 솥에 사과조각을 넣고 타지 않도록 몇 시간이고 휘저어야 했다. 중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었다. 그걸 이쁘게 포장하면 팔 수도 있으련만, 어머니의 윤리학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수십 병에 해당하는 사과쨈을 온 집안 식구가 다 먹어야 했다. 빵에 발라먹고, 과자에 찍어 먹고, 심지어는 밥에도 비벼 먹어봤다. 그래도 남아서 숟가락으로 그냥 퍼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먹은 사과가 판 사과보다 많으리라. 그러니 얼마 못가 두 손 들고 가게를 접을 수밖에.

사과는 다양한 효능을 자랑한다. 사과의 팩틴성분은 채소의 섬유질처럼 장의 운동을 자극하고 장의 벽을 보호하며, 몸에 해로운 유독성 물질을 흡수하여 배출함으로 변비예방에 탁월하다. 사과를 먹으며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고, 심장질환도 예방하며, 심지어 당뇨와 뇌졸중도 예방된단다. 또한 피부미용에도 좋아 사과가 많이 나는 대구에는 미녀들이 많이 산다는 낭설도 널리 퍼지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미녀는 압구정동에 제일 많은데, 그것은 사과 때문이 아니라 의료적 혜택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각설하고. 연말에 산타할멈이 사과 두 상자를 보내왔다. 아침에 두세 알, 매 끼니 전에 한 알을 먹으면 살도 빠지고 건강해진다고 잘 챙겨먹으라고 카드에 쓰여 있었다. 고마웠다. 그런데 아뿔싸, 수렁에 빠졌다. 받을 때는 좋았는데, 먹어치우는 일은 고역에 가까웠다. 상하기 전에 먹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매일 세 알씩 챙겨 출근하였다. 다음날도 세 알, 그 다음날도 세 알. 매일 사과 세 알씩 먹는 것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살이 빠지기 전에 머리털이 빠질 지경이었다. 약 알이야 한 움큼 집어 입에 털어 넣고 반 컵의 물로도 해결되지만, 사과라는 놈은 고혈압약이나 소화제가 아니지 않은가. 일일이 씹어 먹어야 하니 저작운동으로 턱이 아프고, 한 알만 먹어도 배가 불러서 두 알째는 보기조차 싫었다. 받을 때는 축복이려니 했으나 먹고 보니 지옥이었다. 산타할멈이 아니라 마귀할멈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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