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남 고양시새마을회 사무국장

[고양신문] '안녕하세요! 어르신, 날도 차가운데 어딜 그리 가세요?’, ‘오라버니,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지요?’ 며칠 전 주교동의 한 연립주택 단지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쌈지 공원 만드는 일을 상의하는 중, 부녀회장님이 만나는 이웃 분들과 나누었던 인사말이다.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교시간에 맞춰 기다리다 만난 아이들을 데리고 환한 웃음으로 분식집으로 향하는 어머니, 낡은 유모차에 폐지를 가득 싣고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시는 할머니도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담 옆으로는 버려진 쓰레기들과 당장이라도 뽑고 싶은 잡풀들이 골목길 군데군데 무성히 자라는 모습도 보였다.

돌이켜보면, 지금은 사라져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골목은 사랑방이었다.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였고, 어머니들에겐 쌓인 스트레스를 풀며 각종 정보를 주고받는 광장이기도 했다.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찬 공이 담을 넘어 유리를 깨기라도 하면 엄한 꾸지람이 돌아왔고, 숨바꼭질과 고무줄놀이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날이 기울어 어둠이 내릴 즈음이면 그만 놀고 집으로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부름은 야속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어머니들은 집 앞 작은 평상에 올라앉아 함께 뜯어온 나물을 다듬거나 각 집안의 대소사도 함께 나누던 모습은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과일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가장이 돌아오면 혼비백산 흩어지는 광경도 비일비재했다. 밤에는 가로등 아래에서 다른 이의 눈에라도 띌까 설레며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에게는 추억의 공간이기도 했다.

골목 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따뜻한 이야기가 있었고, 고달픈 세상살이에 지친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며 삶의 지혜를 찾아가던 사랑방이었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고 어렵거나 몸이 아파 불편한 이웃의 소식에 위로의 마음을 담아 동치미라도 한 그릇 담아 전할 수 있는 따뜻함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이런 골목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쉽게도 기억과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집에서 나와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나갔다가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집으로 돌아간다. 엘리베이터에 탄 이웃들은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게 다반사다. 거울을 보는 여성,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학생, 게시판이나 홍보물을 보는 아저씨, 벽을 보고 있는 아주머니, 침묵의 시간만 흐르는 공간은 그야말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새마을운동을 권하던 노래의 한 구절이다. 당시 초가집과 오솔길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상징이었다. 도시화와 산업화를 가로막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장애물로 인식됐다. 초가집을 밀어내고 알록달록한 양철이나 슬레이트로 지붕을 바꿨다. 좁은 길도 밀어서 차가 드나들 수 있게 넓혔다. 그 덕택에 우리는 산업화, 도시화를 이룩했고, 남부럽지 않게 먹고사는 수준이 됐다.

우리에게 정겨운 모습의 초가집과 오솔길은 이제 사라졌다. 무자비한 경쟁에 내몰린 우리는 이웃도 경쟁상대고 비교와 질투의 대상일 뿐이다. 복도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들도 더 이상 이웃이 아니다. 풍요로운 삶을 얻은 대가로 우린 이웃을 잃고 정신적인 외톨이가 됐다. 건물로 빼곡히 들어서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에서 외로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요즘 들어 옛날 골목에 대한 정겨움이 새삼 생각난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회에서도 공동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그에 맞는 프로그램들이 사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뭣을 어찌 해야 할지 아직 방향조차 잡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수십 년이 지난 오늘, 물리적인 골목을 재현하기는 쉽지 않을 게다. 요즘의 대세에 따라 우선 사이버 공간에서의 골목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우선 온라인으로 이웃의 애경사나 상호 관심사를 나누고 이후에 오프라인 행사로 연계해 발전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라진 사랑방인 골목을 되찾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보자. 이웃이 함께 모여 소통하며 정을 나누려면 먼저 재미있고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 발굴이 급선무다. 온라인 골목이 활성화되고 나면, 다음으로는 온라인에서 정을 통하고 관심사가 같은 이웃들이 모여 더욱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 옛날 골목이 가졌던 기능을 하는 골목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냄새 물씬 나는 골목이 재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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