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나 이순(耳順)의 나이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잇몸 같은 문우(文友)가 둘이나 있다. 정화진과 김한수, 둘 다 소설가이다. 이들과 형, 동생하며 지낸 지 20년이 지났고, 고양에서 같이 산 지 10년이 지났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밭에서 같이 일을 하거나, 술집에서 술추렴을 하고 지낸다. 새로 글을 쓴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 글을 쓰는 것 마냥 반갑고, 새 책이 나오면 내 책이 나온 것 마냥 즐겁다. ‘청소년농부학교’ 활동도 같이 했기에, 그때 경험을 밑거름 삼아 『청소년농부학교』라는 책을 창비에서 내기도 했다.

한수는 나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친형제처럼 지낸다. 화진이형은 이제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다. 55세 한수는 매양 화진이형을 노인네라 놀리는데, 둘은 이미 30년 지기이다. 서로 알고 지내기로도, 친하기로도 나보다 윗길이다. 술자리에서도 나는 1차가 끝나면 일이 있다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사라지지만, 둘은 서로의 신의를 지키며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이 둘은 정말 친형제지간이라 할 만하다. 한수 아내는 화진이형을 ‘한수 아내’라고 놀린다. 나도 내심 동의한다.

여기에 지방에 살고 있는 소설가 재성이형, 동수형, 인휘형과 시인 태성이는 멀리 있지만 마음은 참으로 가까운 사이이다. 때로 이들이 고양으로 놀려와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하거나, 우리가 지방으로 놀려가 어울리기도 한다. 이 술자리에 창비 사장 일우는 든든한 후원자이다. 작가들이 사정이 어려울 때 귀신 같이 사정을 알아내어 도울 방안을 마련해주는 것도, 철철이 푸짐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초대하는 것도 일우의 몫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한때 노동문학계를 주름 잡았던 작가들이다. 지금까지도 펜을 꺾지 않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면 경이로울 따름이다. 인공지능이니, 4차혁명이니 최첨단을 달리는 문명에 살고 있고, 모두들 스마트폰의 화면에 고개를 처박고 살고 있는 시대에 ‘노동’이란 화두를 아직까지도 붙잡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원고지를 채우며 지내는 작가들을 볼 때마다 나는 막막하고 먹먹해진다. 노동하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이 주인인 세상에 살고 있는지라 이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다. 못난 얼굴이라도 만나면 반갑다고 킬킬대지만, 사는 게 녹록치 않다.

때는 봄인지라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 다 늙어 환갑 나이에 첫 장가를 가는 동수형을 기념하자며 동해 옆에 증산해수욕장에 모였다. 근처에 화마(火魔)가 지나간 지 며칠 되지 않았고, 아직은 이른 철이라 해수욕장은 파시(罷市)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아무도 찾지 않아, 손님이 우리뿐인 허름한 횟집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어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아직도 밤일을 할 수 있냐는 헛농에 아직은 펄펄하다며 얼굴을 붉히는 동수형을 놀리는 재미로 시간은 갔다. 해질녘 세찬 바람이 비를 몰고와 장대비를 쏟으니, 다들 술집 창문을 열고 비구경이다. 몇몇은 비를 더 가까이 맞이하겠다며 아예 술집 밖으로 나와 연거푸 담배를 물었다. 우리들의 한 시대로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정태춘의 노랫말이 환청처럼 귀에 쟁쟁했다.

술병이 엎어지듯 그렇게 엎어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새벽부터 산에 오른 재성이형과 동수형에게 전화가 왔다. 태백에 함박눈이 와 무릎까지 쌓였단다. 시원하게 끓여놓은 대구탕으로 속풀이를 하고, 함박눈을 영접하러 차에 오른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쌓인 눈에 한수도 화진이형도 탄성을 지른다. 아직은 살아있다며 냉기를 품고 산나무들 위에 하얀 관을 만들고 있는 눈발을 보며, 우리는 저마다 처연한 마음으로 봄날을 보낸다. 뜨거운 입김이 솟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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