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 ‘고양’에 대한 애정 담아

일상에 대한 잔잔한 애정
타향 위에 고향을 만들자, 제안

 


[고양신문] 김훈 소설가가 최근 발표한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에서 호수공원과 정발산 숲, 장항습지 등 고양시 곳곳의 풍경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냈다. 22년째 일산에 거주하는 ‘친근한 이웃 작가’의 글을 만난 고양의 독자들은 “반갑고 감동적”이라는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책 서문에서 작가는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작가의 세심한 애정은 책의 맨 앞부분에 실린 ‘호수공원 산신령’이라는 글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9일 호수공원에서 만난 김훈 작가는 “허허벌판이던 일산 신도시에 가장 먼저 들어와 20년 넘게 살았으니 이제는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일산과 호수공원 이야기를 일부러 첫머리에 배치했다”고 밝혔다.  

작가는 50대와 60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정발산의 숲과 호수공원 나무에 많이 의지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나무들이 자라는 과정을 20년 동안 지켜보니 ‘가지가 벌어진 각도나 방향은 어렸을 때의 표정 그대로’라며, 마치 대견하게 자란 이웃집 청년을 바라보듯 말한다. 고양시가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한 20년은 작가에게 늙음의 시간이자, 동시에 ‘장소’와 교감하는 위로의 시간이기도 했나보다.

책 후반부에 실린 ‘새들이 왔다’라는 글은 한강 하구 장항습지를 찾는 철새들에 대한 상념으로 시작한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급팽창해 누구의 고향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일산 신도시지만 다행히도 ‘수만 년 동안 먼 데서 새들이 찾아오니, 사람이 마음 붙이고 살 만한 동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흔적이 스미는 ‘스토리’를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구체적으로 신도시가 성장하는 동안 화재진압과 인명구조 현장에서 순직한 일산소방서 소속 소방관 3명의 흉상을 호수공원에 모시자는 것. ‘이 동네가 뜨내기들이 살다 가는 신도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의 마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훈 작가가 고양의 이웃들에게 전하고픈 이야기는 이것이다. “우리는 타향 위에 고향을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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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20년 살고나니 '호수공원 산신령' 됐다


소멸하는 존재 응시하는 시선
생동하는 것들 향한 경탄으로
“문화·이야기가 공동체 만들어”

 

호수공원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김훈 작가와 이영아 고양신문 대표.

 
[고양신문] 칠순에 접어든 김훈 작가가 발표한 신간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에서 가장 먼저 감지되는 것은 나이들어가는, 또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호수공원의 가을날을 그려낸 글 속에서 작가는 메말라가는 연잎과 억새, 그리고 추위가 찾아오면 어딘가에서 소리 없이 죽어갈 가을 잠자리떼와 매미의 운명을 생각한다. ‘늙기와 죽기’라는 글에서는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날이 저물 무렵의 시간을 ‘내가 사는 동네, 일산 한강 하구의 썰물과도 같다’고 묘사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사람들에게 옮겨가면 글에 윤기가 얹어진다. 호수공원 폭포광장 주변에서 여름에는 그늘을 따라, 겨울에는 햇빛을 좇아 장기판을 옮겨다니며 함께 늙어가는 노인들에게서 기억과 소멸의 한 풍경을 엿보기도 하고, 곳곳에서 그룹을 지어 시간을 보내는 여성 노인들의 수다를 나중에 글 쓸 때 써먹겠다는 핑계로 ‘무심한 척’ 엿듣기도 한다.

소멸하는 것에 대한 성찰은 생동하는 것에 대한 경탄과 연결된다. 작가는 책 곳곳에서 사랑의 몸짓을 나누는 연인들에 대한 애정과 경탄을 숨기지 않는다. 호수공원에서 자주 마주친, 기타를 가르쳐주고 배우는 40대 남녀가 눈에 띄지 않자 호수공원 전체를 수색하며 ‘그 남녀가 헤어지지 않기를 바랐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길에서, 지하철에서 남들 시선 아랑곳 않고 애정표현을 하는 젊은 커플들에게 굳건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가장 유쾌한 대목은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유치원 꼬마에게 작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 장면이다. 꼬마는 뒤늦게 나타난 엄마에게 ‘내가 넘어져서 우는데, 이 산신령 할아버지가 날 구해줬어’라고 말한다. ‘일산에서 20년을 살고 나니 나는 호수공원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대목에선 작가의 ‘일부심(일산 주민의 자부심을 일컫는 젊은이들의 신조어)’이 반짝반짝 묻어나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그런가 하면 동네에 새로 생긴 소아과 병원에서 엄마와 뽀뽀를 주고받는 꼬마, 동네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 라이더, 정발산 공원 새벽안개 속에서 공을 차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이웃들의 다양한 삶의 결을 골고루 성찰한다.

마을에 대한 애착은 미각에까지 이어진다. 남북정상회담 때 두 정상이 평양냉면을 함께 먹은 장면은 백석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수수하고 슴슴한’ 국수 묘사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백석이 먹은 냉면의 맛은 내가 일산 신도시의 식당에서 사 먹는 냉면의 맛과 그 기본과 지향성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밝히기도 한다.

길에 대한 명상도 담겼다. 그는 고양의 주요 교통로인 의주대로와 경의선철로를 천여 년 역사 속에서 전개된 침략과 항쟁, 굴종과 저항의 축선이라고 정의한다.
김훈 작가에 의해 고양의 독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의 평범한 풍경과 일상이 역사의 순간과 연결되고 존재의 깊이와도 이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선물 받는다.

호수공원에서 만난 김훈 작가는 ‘고향’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했다. 그가 말하는 고향은 물리적 출생지로서의 개념을 뛰어넘는다.
“일산은 외지인들이 들어와 만든 인공의 도시잖아요. 그러다보니 이곳을 내 고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적은 것 같아요. 이제는 마음을 기댈 공동체의식과 문화를 만들어가야지요.”     

그는 공간에 ‘이야기’가 깃들 때 비로소 정주의식이 생기고, 고향이라는 자의식도 생긴다고 말했다.
“공양왕릉이나 최영 장군 묘처럼 깊고도 오랜 이야기를 품은 공간이 초라하게 방치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아울러 괜찮은 식당이나 상점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도 전에 자주 바뀌는 것도 안타깝구요.”

지역신문기자의 편파적 시선으로 책 속에서 고양과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해 강조했지만, 사실 이번 산문집에서 김훈 작가가 다룬 이야기의 폭은 방대하다. 시간적으로는 선사시대 구석기인들의 주먹도끼부터 지난 연말의 송년회 자리까지를 아우르고, 주제 면에서도 세월호 침몰과 촛불광장, 분단의 상처와 평화의 열망까지 당대의 첨예한 고민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세월과 함께 향기를 더하는 좋은 술처럼, 그의 산문은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독자들에게 전하며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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