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 작가 강연 ‘축구로 보는 남북 현대사’

자존심 건 남북축구대결사 흥미진진
현대사 맞물리는 스포츠 정치학 뒷이야기  

 

[고양신문] 본명보다 필명 ‘산하’로 유명한 역사 스토리텔러 김형민 작가가 지난 12일 화정도서관을 찾아 ‘축구로 보는 남북 현대사’라는 강의를 진행했다. 지상파 방송 PD가 본업인 김형민 작가는 서민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주특기다. 이와 함께 역사 속에 숨은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흥미진진한 글솜씨에 담아내는 작업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그렇게 묶어낸 책들이 『양심을 지킨 사람들』,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한국사를 지켜라』 등 여러 권이다.
오는 7월 남북체육교류협회 주최로 남과 북이 참가하는 국제여자축구대회가 고양시에서 열린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남과 북의 축구사에는 어떤 일이 숨어있을까. 김형민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축구로 보는 남북 현대사’를 주제로 화정도서관에서 강의를 펼친 김형민 작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축구의 마력

축구는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스포츠인 동시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고스란히 녹아드는 매우 정치적인 종목이다. 영국은 19세기 중반 처음으로 축구협회를 조직하고, 경기 룰을 정비한 공로로 ‘축구 종주국’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피파(FIFA, 국제축구연맹) 홈페이지에서는 기원전 206년 중국에서 공놀이를 했다는 기록을 축구의 가장 오랜 기원으로 밝히고 있다.
축구가 민족주의·국가주의와 결합된 사례는 세계사 곳곳에서 발견된다. 파시즘 정권을 이끈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국제대회에 나서는 자국 대표팀에게 '우승 아니면 죽음'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축구경기장에서의 감정대립이 실제 전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콜롬비아의 한 축구선수가 귀국 후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도 있다. 이처럼 축구에는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에너지가 늘 잠재돼 있다.


분단과 함께 시작된 사생결단 맞대결

축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일제강점기 축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1920년 발행된 ‘개벽’ 잡지에는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는 글이 실린 바 있고, 1935년 경성축구팀이 전 일본 축구대회에 우승하자 민족 전체가 열광하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 한반도의 양대 도시인 경성과 평양과의 라이벌전(경·평 축구경기)이 뜨거운 열기 속에 치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방에 이어 분단이 찾아왔다. 남과 북의 기나긴 ‘축구 사생결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올림픽에 먼저 발을 디딘 팀은 남한이었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해 첫 경기에서 강호 멕시코를 5대 3으로 꺾는 파란을 일으킨다. 이후에도 남한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과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연이어 출전했지만, 연이어 강호들에게 크게 패하며 세계수준과의 격차를 실감한다.


영국 월드컵에서 파란 일으킨 북한

전세가 역전된 것은 1960년대다. 북한이 무서운 적수로 성장한 것. 북한 대표팀은 1966년 영국 월드컵 첫 경기에서 최강 이탈리아를 꺾어 축구팬들을 경악시킨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포르투갈을 맞아 전반에 3골을 넣으며 파란을 이어가지만, 후반 내리 5골을 실점하며 아쉽게도 패배한다. 그러나 1966년 북한팀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큰 이변과 충격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남긴다.
당시 남과 북의 국력을 비교해보면, 1인당 국민소득에서 137달러 대 97달러로 북한이 남한을 앞서고 있었다. 자극을 받은 남한은 당시 실세 중에 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진두지휘 하에 ‘양지 축구팀’이라는 국가대표팀을 직접 육성한다. 양지팀은 ‘북한을 무조건 꺾어라!’는 사명 완수를 목표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남과 북의 ‘스포츠 대리전’ 갈등이 가장 극렬했던 대회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이다. 대회 개막 2주 전에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이 발생했으니,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자명하다. 모든 종목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건 메달경쟁이 펼쳐졌지만, 축구만큼은 북한과의 확연한 전력차를 의식해 일부러 에선에서 패하며 맞대결을 피하는 굴욕을 선택한다.

 

비슷한 궤적 보여준 축구실력과 경제발전

하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남한이 산업화에 가속도를 내며 북한을 경제적으로 앞질렀고, 이에 발맞춰 축구실력도 북한을 추월하기 시작한다. 전환점을 찍은 대회는 1978년 아시아청소년대회다. 지금은 베트남 축구 영웅이 된 박항서 감독이 주장으로 출전한 이 대회에서 남한은 승부차기 끝에 드디어 북한에 승리를 거둔다.
같은 해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남과 북은 다시 한 번 사활을 건 승부를 펼친다. 서로의 체제 우월성을 내건 ‘새마을’ 대 ‘천리마’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난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남한은 경제규모와 축구실력에서 나란히 북한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북한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심판 폭행 사건으로 2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조치를 먹으며 국가의 운명과 비슷하게 축구 역시 폐쇄적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반면 남한은 북한의 출전금지로 인해 어부지리로 출전권을 얻은 1983년 멕시코 청소년세계선수권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4강 신화를 쓰며 ‘붉은 악마’라는 별칭을 얻는 영예를 누린다.
이후 북한은 남한의 88 서울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1989년 평양세계축전이라는 무리수를 두는 시점부터 경제가 확연히 몰락하며,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1990년에는 남과 북이 함께 단일팀을 구성해 국제청소년대회에 참가해 8강 진출의 개가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후 남과 북의 실력차가 점점 벌어지고 기계적 비례제의 한계가 드러나며 더 이상 단일팀은 구성되지 못한다.


화해로 써 내려갈 새로운 축구역사

남과 북은 왜 그렇게 축구에 목숨을 걸었을까? 분단보다는 한국전쟁의 영향이 크다고 판단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상대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고,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결국 남과 북은 축구를 통해 우습고도 슬픈 대리전쟁을 치른 것이다.
남과 북이 배출한 새로운 세대 스타들은 선배들과는 다른 길을 열었다. 박지성 선수는 실력뿐 아니라 성숙한 인격으로 세계적 선수가 됐고, 재일교포 정대세 선수는 남아공 월드컵에 북한 대표팀으로 출전해 인상적인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최근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한 증오로 얼룩진 역사를 끝내고, 믿음의 다리를 조금씩 놓아가고 있다. 이제 갈등과 대결의 도구가 아닌, 화해와 교류의 매개체가 되는 새로운 축구 역사를 기대해보자.
 

※ 금요일 오후 7시30분부터 화정도서관에서 열리는 김형민 작가의 역사강좌 ‘교양 PD와 함께 나누는 역사이야기’는 오는 19일과 26일, 2회 강연이 남아있다.
▲19일에는 ‘최고의 짝(일제강점기 손기정 남승룡부터 한국전쟁기 유호-박시춘까지)’ ▲26일에는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았을까(경의선에 몸을 실었던 밀정과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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