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광석

고광석  대명한의원장

[고양신문]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사는 고양시는 인문학 열기가 꽤 높은 편이다. 주민자치센터의 인문학 강좌도 그렇고 대형교회와 각 도서관 그리고 대형서점의 인문학 강좌까지 다양한 공부 모임이 있다.

본인도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 오래전부터 친한 이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닌 책을 보려면 다른 사람이 추천한 책을 읽는 게 도움이 된다. 지역에서 독서회가 잘되고 있어서 내친김에 고등학교 동기 독서회도 만들었다. 아저씨들이 이젠 술만 마시지 않고 뭔가 지적 허세를 부리며 수다를 떤다. 그 즐거움에 동기 독서회도 힐링 모임이 되었다.

이성복 시인은 ‘인생은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아서 부지런히 노를 젓지 않으면 뒤처지게 된다’고 했다. 부단히 책을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밝은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대로 예전에 비해 하루하루 변하는 속도가 가히 혁명적이라 자칫 멈칫하다가는 한참을 뒤처지게 되는 때다.

이달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은 `야마구치 슈`가 출간한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였다. 철학에 관한 궁금증은 누구나 있지만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문제를 인식하고 쓸모 있는 철학 이야기를 편하게 다룬 책이다.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50명의 철학자, 문화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들이 생각하는 철학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벌써 13쇄나 인쇄했다고 하니 철학서도 인기 있다는 게 놀랍다. 그만큼 삶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50가지 내용 중에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은 부분은 심리학자인 `쿠르트 레빈`의 ‘`혁신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와의 작별에서 시작한다’`였다. 레빈에 의하면 어떤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정착된 조직은 `해동-혼란-재동결`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다.

제1단계 해동(unfreezing)은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을 바꿔야 한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변화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원래 자신의 내면에 확립된 관점이나 사고를 바꾸는 데 저항감을 느낀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꼼꼼하게 준비해야 한다. 제2단계 혼란(moving)에서는 예전에 갖고 있던 견해와 사고, 또는 제도와 프로세스가 불필요해지면서 혼란과 고통이 생긴다. 예전대로 원활히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역시 예전 방식이 좋았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단계다. 제3단계 재동결(refreezing)은 새로운 관점과 사고가 결실을 이뤄 시스템에서 적응하는 단계로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느껴 변화를 받아들이고 유지하려는 항상성 감각이 되살아난다.

레빈의 지적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지금까지의 방식을 `잊는` 것, 즉 이전 방식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수많은 조직의 혁신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흐지부지 좌절되고 마는 이유가 `새로운 시작`에만 주목해 대체 무엇이 끝났는지 무엇을 끝내야 하는지 `끝`에 관한 물음에 진지하게 맞서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 정부 들어서 적폐청산을 공언했다.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려면 우선 과거의 것을 끊어야 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레빈이 예견한 대로 우리사회는 많은 혼란과 저항을 겪고 있다. 예전이 좋았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기도 한다.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설치로 국회에서 벌이는 난장판을 보는 불편한 시각들이 있음을 알지만 꼭 넘어야만 할 산이다. 아직 산적한 많은 문제를 끝내는 과정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번 정부가 그 과정을 잘 견디고 반드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소명을 완수하리라 믿는다. 신영복 선생은 ‘용기는 어떤 것을 취하는 데 있는 게 아니고 어떤 것을 버리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지금 우리에게 딱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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