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고양신문] 이창동 감독의 2010년 연출작 '시'는 당대 최고 배우였던 윤정희의 컴백만으로도 엄청난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까지 모두 평단과 관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던 이창동 감독이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칸 여우주연상의 주인공 '밀양' 덕분일 것이다. 큰 상을 받은 후 부담이 됐을 법도 한데 3년의 세월이 지난 후 선보인 '시'는 다시 칸의 레드카펫에 올랐고 각본상을 받았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화다운 영화”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영화의 주인공 양미자 할머니는 간병인으로 일하면서 홀로 손자를 키우는 외로운 사람이다. 아들을 맡긴 딸은 코빼기도 비추질 않지만, 할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딸을 소개할 때면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라고 말한다.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할머니에게 있는 낙이라면 시를 배우는 일이다. 함께 배우는 사람마다 시가 참 어렵다고 말하지만, 동네 사람들과 함께 열심을 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할머니에게 치매 초기 증세가 발견된다. 말을 나누고 싶지만, 점점 더 말할 상대가 없는데 설상가상 말을 잃어가고 있는 할머니는 시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날 양미자 할머니의 손자 종욱이와 학교 여러 무리가 동창 여학생을 집단으로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피해자 학생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고 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종욱이는 그 사실을 할머니에게 털어놓기는커녕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할머니는 집단 성폭행을 범한 아이들의 부모 모임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부모들은 피해자 아이의 홀어머니와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고자 합의금을 제안한 것이다. 딸아이를 잃은 어머니는 일상을 이어갈 수 없는 슬픔과 충격에 빠지지만, 가해자 부모들은 타인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아들의 안위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있고 할머니도 분담금 500만원을 치욕스럽게 준비한다. 우리는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산 아이들이라도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할머니의 이런 고민을 이어가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시간을 시를 배우며 견뎌낸다.

할머니와 함께 시를 배우는 마을 사람들도 모두 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시를 배우는 과정이 끝나면 각자 자신의 창작물을 발표하기 위해 시를 쓰지만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 삼아 나름의 세계를 빚어낸다. 마침내 사랑을 발견한 아주머니도 있고, 바른말만 하다가 시골로 좌천된 경찰관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쉽게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시를 통해 꺼내어 놓는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결국, 양미자 할머니 말고는 누구도 시를 완성하지 못한다. 할머니는 겨우 500만원을 준비해서 전달한 후에 다른 부모들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이것으로 모든 책임을 다한 것인지 말이다. 합의금을 전달했으니 부모의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들과는 달리 할머니는 무언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어느 날 저녁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아이는 서서히 잊히고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은 부모님 덕분에 아무런 책임 없이 살아가게 된 무렵 손자와 할머니는 재미있게 배드민턴을 친다. 그런데 저쪽 어딘가에서 할머니와 시 수업을 함께 들었던 경찰관 아저씨들이 걸어온다. 경찰관 아저씨 두 명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와 손자에게 다가와 한 명은 손자를 차에 태우고 다른 한 명은 태연하게 할머니와 배드민턴을 친다. 그렇게 할머니의 책임은 마무리되었다.

강도영 빅퍼즐 문화연구소 소장.

영화는 할머니가 혼자 완성한 시를 관객에게 낭독해주면서 끝이 난다. 처음 할머니가 시를 읽을 때 카메라의 시선은 할머니의 일상을 향한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시를 낭독하는 사람이 피해자 아이의 목소리로 변하고 아이가 살아있던 마지막 날 걸었던 그 길을 쭉 따라간다. 그 길의 마지막은 아이가 몸을 던졌던 그 강가였다. 그곳은 영화가 처음 시작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객이 깨닫기도 전에 카메라의 시선은 이미 반 정도 물속에 잠겨있다. 양미자 할머니는 이미 그 아이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완전히 타자였던,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시를 쓰며 고통당하는 타자와 하나가 되는 세상을 상상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 아그네스의 노래 -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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