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회 고양포럼> 김종배 5.18 당시 투쟁위원장

김종배 5.18 당시 투쟁위원장

반성 없는 5·18의 원흉들
법정에 다시 세워 죄 물을 것

[고양신문] 자유한국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왜곡과 폄하가 올해 더욱 심각했다. 역사적 아픔을 겪은 광주시민 입장에선 치가 떨리는 일이다. 20일 열린 고양포럼은 5·18 당시 투쟁위원장을 지냈고 그로 인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종배 전 국회의원의 증언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강연 내용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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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폭도 대장이었으나 지금은 국가유공자다. 수많은 사람들의 옥고와 분신자살 등의 희생을 통해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됐다. 올해 기념식에는 세계 각지의 교민들이 많이 참석했다고 한다. 국내에선 20곳이 넘는 지자체에서 자체 기념식을 열고 희생자들을 기렸다. 하지만 39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상이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은 애석한 일이다. 가해자들이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법으로 응징해야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왔다는 진술이 나오고 있다. 80년 5월 21일 전두환이 광주에 왔고, 전씨가 떠난 지 30분 뒤인 오후 1시30분에 금남로에서 집단발포가 있었다. 그 현장에 나도 있었다. 총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모두 공포탄으로 생각했다. 시민들이 폭력성을 띠거나 무장을 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쓰러져나갔다. 광주시민들은 쓰러진 사람들을 두고 도망가지 않고 그들을 부축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현장에서 68명이 즉사했고, 수백 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죄 없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총살당하자 시민들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2시간 뒤부터는 우리들도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치안이 불안한 상태에서 시민군이 무장을 하고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스스로 모두 회수해 전남도청 지하실에 보관했다. 혹시라도 시민피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빠지고 무장한 시민들끼리 하룻밤을 보내는 사이 광주에서는 단 1건의 강도·절도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시민들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루 뒤 스스로 무기를 회수하고, 치안과 질서를 유지했던 명예로운 시민들이었다.

금남로 발포가 있던 날 시내에서만 희생자가 나왔던 건 아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던 전두환 신군부는 도시 외곽을 완전히 봉쇄했고, 도시를 빠져나가려던 시위대가 탄 버스에 사격을 가했다. 그 사망자가 2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된다. 군인들은 그들을 즉시 가매장한 후 얼마 후 파헤쳐 국군통합병원에서 시신을 태워 증거를 없앴다. 광주시민 200여명이 흔적 없이 사라진 사건이다. 정말 용서가 안 되는 일이다. 당시 행방불명된 215명과 그 수가 비슷하다. 희생자 중에는 증언을 해줄 사람도 없다.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가해자 외에는 그들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 말해줄 사람이 없다.

5·18의 원흉들은 김영삼 정부 때 법정에 섰지만 2년 정도의 감옥살이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건의로 사면되고 말았다. 그때 몇 사람이라도 극형에 처해졌다면 오늘과 같은 망언이 계속 나왔을까 싶다. 5·18 폄하는 역사적 쿠데타다. 이런 망언들은 유가족들은 물론, 당시 5·18에 참여했던, 또 그것을 지켜봤던 모든 광주시민들을 짓밟는 일이다. 역사적 왜곡과 폄하발언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전두환 일당을 살인죄로 고소할 계획이다. 역사 쿠데타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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