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작가를 꿈꾸던 문청(文靑)시절, 문단은 크게 ‘창작과 비평(창비)’와 ‘문학과 지성(문지)’으로 나뉘어있었다. 나의 머리쪽은 창비에 가까웠으나, 가슴쪽은 문지에 끌렸다. 이성적이면서 비판적인 언어로 직조된 백낙청 평론가의 글도 좋았지만, 철학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김현 평론가의 글에 더욱 눈길이 많이 갔다. 특히 그의 짧은 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었다.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하는 것을 무엇 하려고 하느냐? 그 질문은 아직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힌다.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한다!”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나의 머리가 아니라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왜 문학을 하는가? 이런 식으로 문학이 되풀이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문학을 쉽게 써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 도달할 때쯤 무르팍을 쳤던 것 같다. 그리하여 마침내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역설의 미학을 감지했다.

마침내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때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에 도달했을 때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의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아멘, 나는 다시 한 번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나의 지적 지향이 서양적으로는 푸코에, 동양적으로는 장자에 가까운 것은 김현의 영향력일지도 모르겠다. 문과인 것을 죄송해하고, 흙수저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백수인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 땅은, 경제적 효용성을 최고의 잣대로 사용하는 자본주의사회! 오로지 쓸모만을 숭배하는 이곳에서 살아가기가 녹녹지 않다. 인문학마저도 경제적 성공의 도구로 해석되어야 팔리는 이 땅에서 인문학으로 밥 빌어먹는 내 삶의 좌표가 애매하다.

쓸모없는 것이 어디 문학뿐이랴. 인간에게 소중한 것들은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민주니 정의니 평등 따위는 돈이 되지 않는다. 경제적 효용성으로 치자면 참으로 낭비적 가치들이다. 어디 사회적 가치뿐이야. 사랑이니 우정이니 친절 따위도 낭비적이기는 매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은 이 비물질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류 역시 참으로 쓸모없는 종이다.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이 비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느라 자신의 생명도 버린다. 최첨단 과학과 인공지능 시대에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얼마 전 마을자치위원들을 교육시키는 자리에서 나는 ‘쓸모없는 자들의 쓸모없는 공동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마을자치가 사업과 성과와 평가로 이어지는 쓸모의 엔진을 달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인재를 발굴하고 실력을 키우고 경쟁력을 높이는 기업의 정신이 마을공동체의 정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침을 튀겼다. 사업 대신 사람을 챙기고, 눈부신 성과 대신 그늘진 마음을 어루만지고, 평가 대신 따뜻한 대화를 나누라고 말했다. 인재를 발굴하지 말고 소외된 마을 주민을 찾아보고, 실력을 뽐내지 말고 실수를 보듬으라고 말했다. 경쟁력이 아니라 보살핌이야말로 마을자치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아, 나는 쓸모없는 일을 권장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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