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백장현 한신대 초빙교수

[고양신문] 민감한 외교현안이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이 주미대사관 외교관으로부터 한미정상 간 통화내용을 입수한 후, 기자회견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한해주기를 구걸했다고 정치공세를 벌였다. 강 의원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서 정상 간 대화나 통화내용은 양국이 합의해 공개하지 않는 한 국가기밀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민감한 외교현안을 노출시켰다. 지난 2013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정문헌, 김무성 의원 등이 주도했던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이후 두 번째 외교현안을 악용한 정치공세이다.
 

인조반정 이후 벌어졌던 무분별한 외교 행각

역사에서 외교 현안을 정쟁에 악용했던 사례는 많지만, 인조반정 이후 반정 주도세력들이 벌였던 행각은 국가공동체를 파국으로 이끌었던 가장 비극적 사건이다. 동아시아 패권이 명(明)에서 청(淸)으로 바뀌고 있던 17세기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치른 이후 국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지는 해 명나라와 떠오르는 해 청나라 사이 줄타기 외교를 통해 아슬아슬하게 생존을 도모해가는 처지였다. 쿠데타를 통해 광해군 정권 타도에 성공한 김류, 이귀 등 반정세력들은 인목대비의 교서를 통해 광해군의 죄악 열 가지를 열거하며 전 분야에서 광해군 지우기를 시도했는데 외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반정세력은 교서에서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이 도와 준 재조지은을 잊지 못해 죽을 때까지 명이 있는 서쪽을 등지고 앉은 적이 없었는데, 광해는 배은망덕해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서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전투 때에는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아 예의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로 만들었다”며 광해의 중립 외교노선을 성토했다.

그 후 인조 정권은 맹목적인 친명반청(親明反淸)의 길을 가는데, 능력도 의지도 없이 반청의 목소리만 높이다가 결국 청의 침략을 맞게 된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사실상 망국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의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 예식으로 항복을 한 후 친청파로 변신했으며, 조선 민중은 노예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전쟁 기간 청군에 의해 사냥 당해 청나라로 붙잡혀 간 사람들을 ‘피로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들 약 50만 명의 피로인들이 겪었던 고통과 참상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끔찍하다. 동아시아 패권이 바뀌고 있던 미묘한 시기에 인조 정권의 무분별한 ‘반(反) 광해 외교’가 낳은 참상이었다.


급변하는 동북아 국제정세와 강효상 의원

동북아시아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미·소 중심의 냉전질서가 무너진 후 미국 단일패권 시대를 거쳐 동북아는 이제 미·중 양극시대로 진입하였다. 중국의 부상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미국은 미일 동맹, 한미 동맹을 양축으로 중국 봉쇄에 부심하고 있다. 현재 펼쳐지고 있는 동북아 구도는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자칫하면 미·중 간 패권 전쟁에서 남북한이 선봉대로 나서 상잔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로 바뀔 수도 있다. 대한민국이 북미회담을 중재해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남·북한 간 대치와 갈등을 해소시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도 있다.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남북연합 시대를 열 수만 있다면 미·중 간 패권 싸움이 본격화하기 이전에 통일의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또한 남북연합이 동북아에서 미·중, 중·일 간 패권 싸움이 아닌 협력을 중재할 수도 있다. 지구촌 시대인 현대의 국제관계는 경쟁과 협력이 병진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운명 앞에서 정치적 금도 지켜야

현재 북미 관계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냉각기를 지나고 있다. 북미 모두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부심하고 있지만, 비핵화 방식, 대북 경제제재 해제, 정전 선언 등을 두고 커다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문화 차이가 크고 오랜 적대관계 속에서 상호 이해와 신뢰가 없는 북미가 스스로 해답을 찾기는 기대하기 어려우며, 그나마 북미 양쪽에 신뢰가 있는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나서야만 돌파구가 열릴 수 있는 상황이다.

백장현 한신대 초빙교수

이처럼 미묘한 정국에서 강효상 의원의 한미 정상 간 통화내용 공개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한·미 간 이간책이자 북미협상을 방해하려는 노림수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서 각 정파들이 집권을 위해 경쟁하고 정치투쟁하는 것이야 나무랄 수 없지만, 그래도 가릴 것은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국가와 민족의 생존에 직결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금도를 지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마땅한 최소한의 의무이다. 강 의원의 행각은 국민적 규탄을 받아 엄벌에 처해야 할 반(反)민족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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