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0주년 특별인터뷰 - 100세 김상환 어르신

지난달 25일 열린 구순·상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한복으로 차려입은 김상환 어르신.

 

[고양신문] 100점만점, 100%, 100일기도, 백세시대, 백전백승, 백년해로, 백만장자, 백발백중, 백문불여일견, 백과사전, 백년대계, 백년손님, 오곡백과 ··· 99보다 크고 101보다 작은 자연수인 100이란 숫자에 대해 우리는 왜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서 찾아보니 ‘백’의 순 우리말은 ‘온’이다.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다’처럼 전부 혹은 모두를 뜻한다. 100은 전부이고, 완성이고, 완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숫자인 것이다. 

이 세상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100이라는 숫자의 나이가 되면 어떤 느낌일까. 올해 첫날 아침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한 김형석 연세대 교수는 100세가 된 새해 첫날 소감을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99세까지는 두 자리 숫자였는데 오늘부터는 이제 세 자리 숫자가 되니까 내 과거의 연장인가 아니면 새 출발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되고 기대도 있고 그런데 우선 오늘까지 살아오고 일한 것에 감사한 마음 또 한편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남은 인생을 이끌어가야 하나 하는 우려라고 할까요. 참 걱정도 있고 그렇습니다.” 

고양시덕양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구순·상수(100세) 잔치에서 만난 또 다른 100세 김상환 어르신과 이야기 나누다가 따로 날을 잡아서 뵙자고 부탁드렸다. 동시대를 살아온 평범한 시민으로서 ‘백년을 살아보니’ 어떠한 느낌인지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5월 가족의 달을 맞아 고양시덕양노인종합복지관에서 지난달 25일 복지관 이용 어르신 중 구순·상수(100세)를 맞이한 회원 어르신들을 초청해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잔치에는 해당 어르신 7명뿐 아니라 가족 40명과 사례관리 어르신 50명 등 총 100명의 내빈이 참석했고, 문화 공연과 경품 추첨 이벤트 등을 진행하며 흥겨운 시간을 함께 했다.

 

- 잔치에서 소년 같은 표정으로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라며 ‘과수원길’을 멋지게 부르는 모습에 반해 뵙자고 했어요. 
제가 원래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요. 북한에서 소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 형제자매들은 종달새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복지관에서도 동요, 가곡, 경기민요 등 노래강좌는 거의 다 한 번씩 수강했죠. 

-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피난 오셨다고 하셨죠. 
평양이 고향이에요. 1950년 12월 5일에 평양을 출발해 경의선 옆 국도 1번 길을 따라 피난길에 나섰어요. 며칠을 걸어 내려오면서 아무 농가나 들어가서 밥해먹고 대충 자고 하면서 왔는데 중간에 공산군이 섞여있다며 항공기에서 피난민 대열에 기총 사격을 가하는 등 죽을 고비 몇 번을 넘기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남한군대가 피난민들을 더 이상 못 내려오게 막았어요. 피난민 대열에 섞여있을 공산군이 넘어오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군인들이 배를 타고 예성강을 건너는 피난민에게 총을 쏴서 겁을 주며 남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까지 할 정도였죠.

 

고향인 평양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양조장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

 

청년 시절의 김상환 어르신.

- 피난 오면서 어머니와도 헤어졌다고 하셨는데.  
서정이라는 곳에서 어머니와 헤어져서 저만 동료 두 명과 함께 산과 들을 거쳐서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사람이 다니기 좋은 웬만한 길은 인민군이 다 막고 있었기 때문이죠. 잠시 남한으로 내려와 있다가 열흘정도 후에 다시 한국군이 북으로 올라가면 고향으로 가야지 했는데, 어느새 70년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상환아, 난 괜찮으니까 너 먼저 빨리 내려가거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2남매를 2년 터울로 낳고 모두 씩씩하게 키워낸 여장부 같은 어머니셨어요.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까지 김상환 어르신이 겪은 일들은 3박 4일을 들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가업을 이어받아 20대 나이에 운영한 양조장 사업, 소련군 트럭에 치여 억울하게 죽은 큰형, 인민군의 예비검속 명단에 포함돼 잔혹하게 사살된 아버님 이야기, 피난통에 부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들으면서 그런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척 고통스러웠다. 직접 겪은 당사자는 어떠했을지 가늠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 아무런 연고도 없었을 텐데 처음에 남한으로 내려와서는 어떻게 사셨나요.
발이 푹푹 빠지는 서해안 갯벌을 맨발로 건너 옹진반도에 도착해 인천과 충남 서산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대구까지 내려가서 정착했어요. 북한에서 왔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으니 일하게 해달라며 달성에 있는 군부대를 찾아가 사정했는데 두 번이나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피난왔던 후배와 함께 첩보부대를 찾아가 일하고 싶다고 사정했어요. 다행히 받아들여져 첩보부대에서 정보·첩보·공작 관련 일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미군 정보교육대에서 통신교관으로 1954년까지 서울, 경주, 대구 등 전국을 다니며 정보원 양성교육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한창 의료기기 사업을 할 때 대학교수, 해외 거래처 관계자와 함께.

 

-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의료기기용품 사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군대를 나와 부산에서 수입약 유통업을 하며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서울 창신동에 식료품 공장을 만들었는데 7개월 만에 빈털터리가 됐어요. 그 후 조선운수주식회사 외자과에서 수입품 운송을 담당했고,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노조 사무장으로 활동하며 노동운동을 한 적도 있었죠. 

독일 의료기기 본사를 찾아 관계자와 기념 촬영.

평양 소학교 동창 친구가 운영하는 남북의료기기라는 회사에 들어가 부산 지점장, 남북의료기 제작소장, 외자부장 등을 거치며 16년간 일을 했습니다. 마침내 1977년쯤에는 초음파치료기, 심전도기 등을 수입하는 한국 총판 대리점을 역할을 하는 기우의과상사를 차려 독립했어요.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기 전까지 15년 동안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의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 새벽 4시에 서울에서 출발해 남해, 진주, 마산, 대구 등을 돌며 17시간동안 1000km를 혼자 운전하고 다니다가 밤 9시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날이 허다할 정도로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 그렇게 바쁘게 사업하느라 자녀교육에는 신경 쓸 시간이 없었겠습니다.
그렇죠. 매일 부지런히 일하면서 생활 속에서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인 것 밖에 없어요. 하지만 평소엔 좀 엄하게 키웠습니다. 특히 딸들은 밤늦게 귀가하면 혼쭐을 내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가부장적이라고 느낄 정도로요. 다행히 공부는 아이들이 알아서 한 것 같습니다. 

딸 둘에 막내가 아들인데 차례로 이대약대, 서울대 미대, 성대 생물학과를 다녔으니까요. 애들에게 늘 착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양심적으로 살아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근면하고 노력하며 착하게 살자’가 우리 집 가훈인데 다행히 잘 따라주는 것 같아 고마울 뿐입니다. 

- 너무 정정하신데 특별한 건강관리 비법이 있으신지요. 
제 평생 삶이 그래왔지만 무슨 일이든 부지런히 하는 것이 가장 큰 건강비결 아닌가 싶어요. 매일 12시 전에 자고 새벽 5시 전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도 해왔습니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예외가 없죠. 또 과식은 절대 하지 않고 소식을 고집합니다. 담배는 진작 젊을 때부터 끊었고, 술은 적정한 선에서 조절을 하는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소 남들이 꺼리기 쉬운 청소 같은 일을 솔선수범해서 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 올해 100세가 됐습니다. 느낌이 어떠신지요. 
사실 100살이 됐다고 특별히 실감나는 느낌은 없어요. 허나 지금껏 살아보니 인생도 나무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나와서 자라고 열심히 일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나이가 들면 몸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면 꼭 나무를 보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서거 전 남긴 유서에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잖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 인생도 나무나 새처럼 자연과 우주의 일부분 일뿐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집니다. 

- 삶의 목표나 소망은 무엇인가요.
저는 지금까지 제 스스로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40년 이상 살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이고 또 그럴 자신도 있어요. 주위에서 너무한다고 해서 20년으로 줄이긴 했습니다.(웃음)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은 아프지 말고 건강했으면 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김상환 어르신은 평소 즐겨 부르는 애창곡을 한곡 듣고 인터뷰를 마치자는 마지막 요청에 주저함 없이 멋들어지게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이라는 곡을 부르셨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발길 /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 /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100이라는 숫자는 전부이고 완전하다는 의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물이라는 액체가 100도가 되면 끓으면서 기체로 변하는 것처럼. 김상환 어르신이 겪어온 삶의 합체인 100년의 시간 이후에는 이전의 삶과는 다른 변화가 작게나마 생겨서 비록 다 채워지지는 못할지라도 새로운 100년 속에 쌓이길 바란다면 지나친 소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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