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문고·알뜨레노띠 ‘한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김보통 작가 초청 강연
‘대한민국에서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

 

'한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강연을 마치고 독자들과의 기념촬영에 응한 김보통 작가(사진 가운데).

 

[고양신문] 만화가, 수필가, 라디오게스트, 영상작가 등 다채로운 영역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는 김보통 작가가 지난 3일 한양문고에서 열린 ‘한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6월 강사로 초청돼 독자들과 만났다.

김보통 작가는 2013년 시한부 암환자를 소재로 한 웹툰 『아만자』로 데뷔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등장했다. 이어 탈영병을 추적하는 사복헌병 이야기를 다룬 『DP 개의 날』로 다시 한 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에세이스트로도 독보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일상의 순간과 기억의 결을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 안에서 때론 무심한 듯, 때론 섬세하게 담아낸 김 작가의 에세이는 경쟁과 과로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던져주고 있다. 작가는 다양한 매체에 연재한 글들을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살아, 눈부시게!』, 『이거 보통이 아니네』 등의 책으로 부지런히 묶어내고 있다.

변신과 도전을 지속하는 김보통 작가의 행보는 젊은 세대에게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대기업에서 퇴사해 맨땅에 부딪히듯 창작의 길에 도전하고, 새로운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회사를 꾸려 가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 젊은 세대가 안고 있는 보편적 고민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김보통 작가의 강연 내용을 정리했다.

 

‘사업자’로서의 상식과 책임

5년 전 고양시로 이사를 와 사무실을 내며 처음으로 직원을 뽑았다. 그 때 몇 가지 약속을 만들었다. 첫째, 오전 근무를 하지 않고 오후 6시간만 일한다. 둘째, 주 4일만 일하고 금요일부터 쉰다. 창작 작업의 특성상 일하는 시간이 길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근무시간을 짧게 잡고 나니 오히려 한정된 시간에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하려고 다양한 궁리를 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근로조건도 4대 보험, 휴무 보장, 초과근무수당 지급, 퇴직금 적립 등을 보장했다. 관행적으로 비정상적 근무형태가 만연한 만화·웹툰계에선 파격적 시도였다. 덕분에 창작사무실을 운영하는 다른 작가들에게 원망과 질책을 많이 받았다.

주변에선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눈총을 줬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고, 웹툰과 에세이에 이어 영상물, 시나리오, 드라마작업까지 작업분야도 확장되고 있다. 조만간 서울 서교동에 제2 작업실을 열 계획이다. 새로운 일을 찾아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덕분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작가이자 ‘사업자’라고 자각하며 산다. 사업자는 모름지기 고용인들에게 안정된 직장과 미래를 꿈꿀 여건을 함께 제공해줘야 한다. 공동 작업물의 판권이 팔려 2차, 3차 부가수익을 창출하면 그 이익을 작업에 기여한 몫만큼 돌려주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회사의 지분도 직원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오늘의 주제인 ‘대한민국에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으로 돌아가자. 대한민국은 서구사회가 수 백 년에 걸쳐 발전시킨 근대국가를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냈다. 인구와 국민소득, 인간개발지수 등 모든 수치에서 우리는 잘 사는 나라가 됐다. 하지만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노인 빈곤율과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짧은 시간에 성취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부작용이 사회 곳곳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가장 먼저 떠오른 대답은 ‘나도 잘 모른다’였다. 다음으로 ‘나부터가 제대로 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선 교육이 문제다. 우리는 긴 시간동안 질문이 용납되지 않는 교육을 주입받으며 성장했다. 그리고 철저히 서열화된 대학을 목표로 경쟁한다. 군대문화의 폐해도 크다. 군대는 짧은 시간동안 권력의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를 압축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매를 맞으며 이를 갈던 쫄병이 어느 새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고참으로 변신한다. 폭력의 순환과 재생 경험을 군대가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우리사회 곳곳에 다른 모습으로 확산돼 있다.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경계가 희미한 폭력이 나름의 명분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괴로운 밑바닥을 버텨야 지배하는 윗대가리가 된다는 확신을 군대가 학습시켜 준 것이다.

1980년 광주에 대한 트라우마도 우리 사회의 어두움이다. 당시 신군부가 권력 창출을 위해 한 도시를 폭력으로 유린했다는 사실도 무섭지만, 그 사실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전혀 모른 채 동시대를 지냈다는 사실이 더 경악스럽다. 어쩌면 광주의 왜곡된 기억이 우리사회에 집단 무의식적 무력감을 심어놓은 건 아닐까.
 

매 월 첫 번째 월요일, 주엽 한양문고에서 열리는 '한달에 한 번 진짜 인문학' 강연에는 매 회 많은 참가자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운다.


관행의 고리를 끊은 작은 시도

다시 회사 이야기를 해 보자. 내가 남들과 다른 근로조건으로 보조작가들을 대우하자 뉴스에서 마치 나를 만화계 악습과 맞서 싸우는 투사처럼 묘사했다. 그래서 욕도 무지하게 먹었다.

물론 어려운 여건의 작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보다 잘 나가는 작가들에게는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뭔가 부끄러움을 느끼기를 바랐다. 누군가와 함께 수고해 얻은 대가를 정당하게 나누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다른 사무실에서 보조작가로 일하는 이들에게서 메일이 날아오곤 했는데, 작가가 슬슬 보조작가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속으로 기뻤다. 관행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 선택이 이쪽 세계를 조금이나마 바꿨다고 자부한다. 지금은 만화계에서 보조작가를 뽑을 때 급여와 근무조건을 정확히 명시하는 것이 정착됐다. ‘업계 상식’의 기준이 바뀐 것이다.

나는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만들어놓은 ‘훌륭한 체제’의 생존자가 되기보다는, 잘못된 상식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관행의 고리를 끊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김보통 작가의 에세이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와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새로운 세대가 열어갈 희망

나는 신세대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 Z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기존 세대의 말이나 가치관을 믿지 않는다. 그로 인한 갈등도 없진 않겠지만, 나는 그것이 새로운 사회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가능하다면 어른들도 자신에게 잠재된 과거와의 고리를 최대한 끊어 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의 단절을, 그들이 우리와 다른 가치관을 지금부터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자.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어른으로 잘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한달에 한번 진짜 인문학’
7월 강연 - 이종수 법학자 


고양을 대표하는 지역서점 주엽 한양문고와 명품 매트리스 브랜드 알뜨레노띠가 함께 마련한 시리즈 인문학 특강 프로그램이다. 문학과 철학, 역사와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와 학자를 강사로 초청해 매 달 첫 번째 월요일에 강의를 듣는다.
다음 달 초청 강사는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고, 주제는 ‘역사속의 인간과 법-좋은 법과 나쁜 법’이다. 7월 1일(월) 오후 7시.   문의 031-919-6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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