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책이 등장하는 그림에 이야기와
그림 속 책에 대한 상상 함께 담아 

 

신간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한겨레출판)


[고양신문] 본인이 쓴 책(『탐서주의자의 책』, 2004년) 제목을 통해 스스로를 ‘탐서주의자’라고 밝힌 바 있는 있는 출판평론가 표정훈 작가가 6년 만에 새 책을 선보였다.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한겨레출판)은 책이 등장하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림 속 책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가 그림을 그린 화가와 시대에 대한 정보를 작가의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라면, 후자는 그림 속 책을 근거로 작가가 펼쳐 보이는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이 책은 그동안 익히 보아 온 박학다식한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역량과 함께,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꾼 표정훈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독자들에게 안겨준다. 책에는 지식과 정보를 씨줄 삼고, 감성과 상상력을 날줄 삼아 촘촘한 결로 직조한 글들이 38개의 그림과 함께 실렸다.  

책은 만듦새도 빼어나다. 표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으로 꾸몄는데, 오래 쥐고 있으면 초록색 물감이 묻어날 것만 같은 독특한 촉감이 느껴진다(실제로 묻어나진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또한 책을 붙인 부분은 각지게, 펼쳐지는 부분은 둥글게 모서리를 마감해 단단한 지성과 말랑말랑한 감성을 조화시킨 책의 특징을 ‘그립감’으로 즐기도록 했다.      
 

새 책을 낸 표정훈 작가가 지난 18일 가좌도서관을 찾아 독자들과 만났다.

 18일,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도서관을 찾아 독자들과 만난 표정훈 작가는 “그림을 고르고, 자료를 정리하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놀이처럼 즐거웠다”고 말했다. 책만큼이나 그림에도 푹 빠져있다고 고백을 한 그는 “책은 독자가 능동적으로 깊이 다가가야 하는데 반해, 그림은 그림 자체가 열어주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편안함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그림, 내가 다가가는 책”이라고 명쾌히 정리했다. 그 두 가지를 제대로 즐기며 살아가는 고수의 마음풍경이 이 책 안에 녹아 있다.
책에 소개된 그림 중 책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몇 편을 맛보기로 소개한다.
 

▲책은 갖고 싶은 물건이다
 

‘사서’(주세페 아르침볼도, 1566). <이미지제공=한겨레출판>

 작가는 B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책을 너무 사랑하다가 본인 스스로 책이 돼 버린 호모 비블리쿠스(homo biblicus), 서인종(書人種)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유서 깊은 서인종의 일례로 16세기에 그려진 ‘사서’라는 그림을 소개한다.
온 몸은 책으로 꾸며졌고, 자세히 보면 안경은 서궤의 열쇠, 수염은 책의 먼지를 털어내는 먼지털이, 손가락은 책갈피로 끼운 종이다. 작가는 그림 속 주인공이 16세기 프랑스 궁정도서관의 사서 ‘볼프강 라지우스’라고 설명한다. 궁정화가였던 아르침볼도가 탐욕적으로 책을 모으는 라지우스를 조롱하기 위해 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표정훈 작가는 물건으로서의 책에 집착하는 서인종이 조롱 받아 마땅한 존재인지를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러면서 “표지 디자인과 장정(裝幀)을 감상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충분히 독서인”이라며 옹호한다. 뜻밖에 보람과 유익이 큰 독서는 바로 ‘표지 독서’라는 작가의 너그러운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이들이 많을 듯하다.  


▲책은 당당한 자부심이다
 

‘자화상’(소포니스바 앙귀솔라, 1554). <이미지제공=한겨레출판>

앙귀솔라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여성 화가다. 작가는 그녀의 자화상 속에서 결코 한 남성이나 아이에게 소속되지 않은, 자유롭고 독립된 한 인간이라는 단단한 자부심을 읽어낸다. 그림 속 앙귀솔라는 수첩처럼 보이는 작은 책을 들고 있다. 친한 친구들끼리 서로 메시지나 그림을 적어 넣고 돌려보던 책 ‘리베르 아미코룸’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페이스북’이라는 재치 있는 코멘트를 덧붙인다.
이어 책의 판형과 크기와 연관해 다채로운 출판의 역사, 그리고 독서 환경의 변화를 짚기도 한다. 작가는 그림 속 앙귀솔라의 큰 눈에 주목하며 그녀가 남긴 글을 인용한다. “세상과 삶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바라본다. 그 놀라움을 포착하기 위해.”

 

▲책은 '숨고 싶은' 섬이다

‘책벌레’(카를 슈피츠베크, 1850). <이미지제공=한겨레출판>

 책벌레 남성이 자신만의 쇠락한 도서관에서 책에 빠져 있다. 양손에 책을 펼쳐들고 옆구리와 무릎 사이에도 각각 한 권의 책을 끼고 있는 노인의 자세가 무척 불편할 테지만, 노인은 아랑곳 않는 듯 보인다.
작가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적 배경에 주목한다. 혁명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있음에도 현실과 괴리된 과거의 지식에만 파묻힌 독일 시민계층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그림으로 해석한다. 아래 지구본도 상징적이다. 세상은 격변하는데, 서재의 지구본은 멈춰 서 있다.

작가는 조선시대의 문장가 이덕무의 ‘책벌레의 전기’를 인용하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이라는 섬 속에 스스로 갇힌 이들이 존재했음을 짚는다. 그러면서 책읽기가 반드시 새로운 깨달음이나 전진을 동반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책이 있다. 그 책에 가고 싶다’라고 정현종 시인의 시를 패러디하며 “책은 하나의 도피처이거나 망명지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세계와 책 사이의 결코 건널 수 없는 간격의 사다리 위에 선 책벌레 노인에게 “지금 더 없이 행복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책사랑에 대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