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 30년, 도시화 30년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 ③인문학자 김경윤

김경윤 작가의 작업공간인 자유청소년도서관 앞에는 늙은 개 ‘뭉게’가 살고 있다. 지난 5월 고양신문 칼럼을 통해 소개됐던 이 개는 현재 동네 ‘인싸’가 되어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

매년 한 권씩 인문학 책 내고
마을과 학교 곳곳에서 강의
학자로 강사로 농부로 이웃으로
세상의 변화 많이 고민하지만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건 ‘나’
내가 변하면 변혁은 이루어진다

[고양신문] 인문학자 김경윤은 한두 개의 키워드로 규정되지 않는 다면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매년 한 권 이상의 인문교양서를 내는 엄청난 생산력의 작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청중을 감동시키는 인기 인문학강사, 청소년과 청년에게 대안적 삶을 제시해주는 교육자, 고양시 대표 인문학모임인 ‘귀가쫑긋’의 회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모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참여하는 시민, 순환적 생태농사를 짓는 도시농부, 생명·평화 지향적 진보신앙을 공유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꾼 등등. 한편으로 청년 시절 몸 바쳤던 진보운동의 가치를 아직까지 되새기고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혁명가’적 기질을 여전히 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잘 안다는 사람들도 이러한 다양함의 핵심은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맥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여전히 흥미롭게 생각한다. 

일산 신도시 30년을 맞아 희망을 주는 세 번째 인물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시민들의 지적자양분을 채워주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김경윤 작가를 만나봤다. ‘철학은 곧 삶’이라는 김 작가의 말처럼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김경윤이라는 사람이 지닌 다양함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19일 늦은 봄비가 반갑게 내리던 날 김 작가의 작업공간인 마두동 자유청소년도서관에서 진행됐다. 

이 공간은 어떻게 마련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2009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작업공간이 필요해서 처음에 호수공원 옆 오피스텔 공간을 얻어서 작업을 했는데 몇 년 하다 보니 이 비용이면 도서관을 차릴 수 있겠네 싶더라. 갖고 있는 책도 많았는데 나 혼자 보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향유하면 좋겠다 싶어 도서관 형태로 이곳에 공간을 차리게 됐다. 

그때는 작은도서관이라는 개념도 잘 없었을 때인데.
동녘교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을 먼저 접했었다. 당시 대부분은 어린이도서관이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청소년, 청년들이 올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고 싶었다. 아마 청소년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는 고양시에서 처음일 거다. 

도서관은 어떻게 활용하나. 
예전에는 독서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했다. 학부모, 학생들을 위한 인문학 모임도 하고 서울대 추천도서 읽기 모임도 5년 가까이 진행했었다. 그 다음에 진행했던 게 청소년 농부학교다. 이제 책 읽는 거는 그만하고 몸 쓰는 교육을 한번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다. 3시간 프로그램이었는데 한 시간 일하면 한 시간은 놀고 한 시간은 자고 이런 식이다. 

83학번인 김경윤 작가는 그 시절 대학생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민주화운동을 온몸으로 겪었다. 약간 특이한 점은 학생운동이 아닌 교회 청년운동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졸업 이후에도 그는 진보적 청년운동에 투신하다 98년 국가보안법 혐의로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과거 이야기가 궁금하다. 사회운동을 처음 접했던 시기가 언제였나. 
학생운동보다는 교회청년운동 쪽에 관심이 많았다. 정체성이 대학생보다는 교회인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교회가 먼저 변화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명동성당 앞에서는 매일 집회가 있었는데 우리교회는 너무 조용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성명서를 쓰고 밤샘기도를 하고. 그렇게 활동을 하다가 교회에서 결국 쫓겨났다. 
더 이상 교회활동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져버려서 그 이후에는 지역 청년활동을 시작했다. 서울 신당동에서 중구지역 민주청년회라는 청년회조직을 꾸려서 시작했고 나중에는 더 광범위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서울중부지부로 가입하게 됐다. 이후 진보민중청년단체연합(진보민청)의 부의장까지 지냈고 97년 대선 이후 공안탄압으로 인해 감옥에 다녀왔다. 

대부분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것과 달리 교회운동을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나 같은 경우는 교회적 질문으로 바꿔서 던져봤지만 교회는 거기에 대해 적절한 답을 내주지 못했고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독서활동을 시작했던 것 같다. 어떤 운동을 시작하면 그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해명하는 그런 책들을 많이 읽게 됐다. 그러면서 점차 의식화됐던 것 같다. 

졸업 이후 진로에 대한 고민도 컸을 것 같은데.
농담 같겠지만 (고민이)별로 없었다. 이미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었거든. 대학 시절에 노동자들 대상으로 강의를 몇 번 해보니 글 쓰고 누군가 앞에서 떠드는 일이 천직처럼 느껴졌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냥 내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정도였다. 그래서 결혼 직후인 95년쯤에 진보민청 활동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철학사냥」이라는 책을 처음 써봤다. 고대부터 근대 철학까지 다뤘는데 젊은 열정으로 꽤 재밌게 썼던 것 같다. 

감옥에서 나온 뒤 김경윤 작가가 몸담았던 진보민청은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 김 작가는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논술학원 강사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무엇을 했나.
그때 아내가 피아노학원을 하면서 돈을 벌면서 뒷바라지를 해줬다. 나오고 나니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이제는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겠다 싶어 일거리를 찾아봤다. 마침 아는 후배가 연신내 쪽에서 논술학원 강사를 구하고 있기에 그때 시작하게 됐다. 

논술강사 일은 성향에 맞았나.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논술이라는 영역 자체가 진도도 없고 그때만 해도 강사의 재량권이 높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학원이 잘 운영되다 보니 나중에 부원장까지 제안받기도 했다.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고. 

강사일은 언제까지 했나.
2005년에 그만뒀다. 돈을 번다는 것은 곧 시간이 투여돼야 하기 때문에 삶이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오전 9시 재수 종합반부터 시작해서 새벽 2시까지 수업을 하다 보니 개인생활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하던 중 같이 일했던 김한수 작가가 ‘형 이제 그만할 때 됐어’ 하기에 ‘그럴까’하고 별 고민 없이 그만뒀다.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아왔던 김경윤 작가는 2001년 일산의 한 논술학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고양시로 이사를 오게 된다. 얼마 후 그는 작은 도서관에 방문한 계기로 동녘교회와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학원을 그만 둔 2005년부터는 교회 내에서 인문학강의를 하며 본격적인 지역 활동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인문학 강의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학원을 다니면서 동녘교회에서 몇 번 강의를 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썩 괜찮은 일이 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은 엿봤다. 돈도 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고 내가 어떤 것들을 기획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고. 나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 대상으로 ‘아이들 논술 잘하는 법’을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엄마들과 공부하는 모임까지 연결됐는데 그 경험이 썩 재밌었다.

강의내용은 어떤 방식으로 준비해오는지
하나에 꽂히면 깊게 파는 성격이다. 책 한 권을 가지고 강의를 한다고 해도 잘하기 위해 관련 책들을 몇 권씩 읽고 들어가던지 그런 식이다. 그러다보니 나만의 컨텐츠를 만들어왔던 것 같다. 이것저것 접하면서 나와 궁합이 맞는 게 뭐가 있을까 좁혀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인기가 많았던 장자강의 같은 것들도 그런 식으로 구성해왔다.   

단순히 사상가의 말을 전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전달하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일 것 같다.
사상가를 사상으로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삶으로 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고대 사상가들의 경우 그 사람의 삶은 알 방법이 없다. 그 사람의 정보는 책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장자를 예로 들면 장자라는 책 외에는 나머지 내용들은 남아있지 않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나는 장자라는 사람을 사상으로만 접할 뿐이지 그의 삶은 ‘알 수 없음’이다. 그렇다면 고전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강사의 역량인 셈이다. 그들의 사상적 이야기를 삶으로 번역하면 이런 이야기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개념을 학문적으로 풀어서 정리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정리하는 것이 나만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누구인가.
장자와 예수다. 두 사람 모두 사상의 기본조건은 가난이었다. 그들은 가난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러한 삶들이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예수를 살펴보자. 29살에 출가해서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자기 삶을 시작하면서 특별한 경제활동이 없었다. 12명의 제자들도 변변찮은 경제기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어떻게 보면 ‘거지연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이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탄생과 연결되지 않았겠나. 불교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삶을 택했음에도 그들의 모습이 찬란하다면 우리가 굳이 엄청난 부자가 되어야만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밑바닥이기 때문에 아무런 걸림돌 없이 더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내용의 강의를 하면 학부모들은 별로 안 좋아했을 것 같다.
물론 그런 분도 있지만 의외로 경청하는 사람이 많다. 평소에 자본주의적 성취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경우도 많고 내 이야기에 완전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라고 느끼기도 한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교회의 작은 모임에서 시작한 김경윤 작가의 인문학 강좌는 이제 전국적으로 다닐 정도로 유명해졌다. 고양시에서도 한양문고와 도서관 등 여러 강연을 통해 ‘팬클럽’이 생길 만큼 유명해졌으며 올해부터는 지역 인문학모임인 ‘귀가쫑긋’의 대표까지 맡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도시농부는 언제부터 시작하게 됐나.
우연한 계기였다. 교회에서 「금강경」과 「예수전」을 함께 가르쳤던 적이 있었는데 수강생 중에 한 분이 나중에 이야기하길 자기는 불교도고 며느리가 기독교여서 처음에는 너무 싫었는데 내 강의를 듣고 예수를 다시 보게 되고 며느리와 화해까지 했다며 고마워했다. 그리고는 장항IC 근처에 자기 땅이 좀 있는데 무상으로 빌려줄 테니 농사를 지으라고 하시더라. 사실 그때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는 말만 했었지 실제로 해본 건 처음이었다. 

인문학자로의 삶과 농사짓는 일이 연결되는 부분도 있나.
만약 내가 농사를 짓지 않았다면 생태문제에 대해 이 정도로 깊게 사고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작물을 지어보면 10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100의 결과물을 거둘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할까. 투입과 산출이 비대칭적이다보니 어느 순간 결과에 대해 너무 매달리지 않게 되더라. 어쩌면 이게 세상의 진리가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성공과 실패라는 것도 결국에는 우연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철학을 ‘삶의 방식을 정하는 매개체’ 정도로 정의하곤 했는데 본인은 어떤 삶을 꿈꾸는지 궁금하다. 
언젠가 교회 목사님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 그렇게 박해받고 쫓겨났는데 다시 교회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때 살짝 술에 취해서 했던 답이 ‘거룩해지기 위해서’였다. 이건 기독교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의 목표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 단순히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거 세상을 바꾸는 것을 꿈꿨는데 지금의 활동들도 여전히 그것과 맞닿아 있는가.    
운동권 시절을 돌이켜봐도 세상을 바꾸는 것과 함께 나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했었다. 내가 괜찮은 사람,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면 그 지식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친절해야 한다고 본다. 돈 있는 사람이 겸손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에도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어떻게 하면 세상이 크게 바뀔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한다. 다만 예전에는 내가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했다면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겠다 정도로 바뀌었다. 모든 사회변혁은 결국 사람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태도만 바뀌면 혁명은 시작된다고 본다. 그리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뿐인 것 같다. 그래서 좀 더 괜찮은 방식으로 나를 바꾸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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