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상만 인권운동가

고상만 인권운동가

[고양신문] 지난 현충일에 행한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어디냐’는 논란이 일었다. 17분 분량의 기념사 중에 단 한 번 등장한 약산 김원봉을 두고 자유한국당은 강력 반발했다. 약산이 북한정권의 수립에 기여한 인사인데 그런 자를 현충일에 언급한 것은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자유한국당 대표는 6‧25 전쟁 영웅으로 칭하는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백선엽씨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지난 2005년 정부기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인물이었다. 우리 군대의 뿌리가 어디냐는 논쟁이 폭발한 계기였다.

약산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때는 2015년이었다. 1270만 명이 관람한 영화 ‘암살’이 개봉된 후 당시 정치인들은 앞 다퉈 약산의 의열단 활동에 대해 칭송했다. 그런 약산이 지금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약산이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가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훈장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대통령 기념사 어디에도 약산의 서훈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약산의 서훈 문제가 오늘날 쟁점이 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과연 약산은 북한 정권의 수립에 기여했을까. 사실은 또 다르다. 약산은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 조차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1958년 북한에서 숙청당할 때의 혐의 사실이다. 당시 약산은 김일성에 대해 비판하며 북한의 정치체제를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약산은 국제 스파이 혐의로 숙청된다. 이런데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것인지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알려진 것처럼 약산은 1919년 의열단을 결성한 후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그런 약산은 일제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1938년, 약산은 보다 조직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조선의용대를 창설했고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그곳에서 약산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군무부장을 맡았고 해방 후 스스로 돌아온 곳은 북이 아니라 분명 대한민국이었다.

그런 약산이 훗날 대한민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사건이 벌어진 때는 1947년 4월이었다. 그날 약산은 집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중에 서울 중부경찰서로 연행된다. 그곳에서 마주친 경찰은 충격적이었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 끝에 여러 명을 살해한 친일 악질경찰 노덕술이었다. 약산은 그곳에서 노덕술에서 3일간 고문을 당한다. 다행히 주변 도움으로 석방된 후 다시 3일, 약산은 울부짖었다고 한다. “내가 일제치하에서도 당하지 않은 치욕을 해방된 조국에서 당했다”며 통곡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극은 끝이 아니었다. 약산에게 충격적인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그해 7월 서울 혜화동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총격으로 암살된 사건이었다. 약산은 여운형 선생이 암살되는 것을 보며 자신 역시 이곳에 있으면 암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결국 이것이 ‘가기 싫지만 북으로 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해서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하는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함께 평양을 방문한 약산은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남게 된다. 이게 약산이 북으로 가게 된 간단한 경위다.

결론적으로 약산에게 훈장을 주자는 것은 다른 행적이 아니라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 부분이다. 이에 대해 반대자들은 약산의 독립운동 이후 행적 논란을 제기하는데 정말 그럴까? 이 글에서 언급했던 친일 악질경찰 노덕술은 과연 대한민국에서 훈장을 받았을까? 받았다면 몇 개를 받았을까? 한 개? 두 개? 놀라지 마라. 무려 세 개다. 친일 악질경찰인 노덕술에게도 준 훈장을 약산은 안 되나? ‘사실도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니 안 된다고? 정말 놀라지 마라. 황장엽을 기억하는가? 그는 김일성대학 총장 출신의 북한 최고위급 인사였는데 북한정권의 지배 논리인 ‘주체사상’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다가 김정일의 미움을 사서 1997년 우리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13년간 대한민국에서 살던 그가 2010년 사망하자 당시 이명박 정부는 황장엽씨에게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장을 서훈한 후 현재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해 줬다. 그가 안장된 위치는 대한민국 순국열사보다 더 높은 단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왜 약산만 안 되나? 친일 악질경찰 노덕술도 되고, 주체사상을 만들었다는 북한 최고위급 황장엽도 되는데 왜?

약산의 독립운동사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근 30년간 행한 약산의 독립운동 공적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약산이 친일 악질경찰 노덕술에게 당할 때 과연 대한민국은 무엇을 했나. 이제라도 지켜줘야 하지 않나. 내가 약산의 서훈을 주장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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