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광석

고광석 대명한의원장

[고양신문] 작년 5월부터 집사람과 탁구를 하고 있다. 실내운동으로 미세먼지 걱정도 없고, 또 큰 힘 들이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을 고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탁구를 하게 되었다. 직장 근처에 탁구클럽이 있어 접하기 쉬웠던 것도 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기본기를 잘 익혀야 하는데 어려서 엉터리로 익힌 걸 바꾸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게다가 한창 배워 익혀야 할 때 선배님이 여신 태극권 도장의 수련생이 되는 바람에 그나마 배우던 것도 접게 되었다. 집사람은 꾸준히 하고 있는데 썩 즐기는 기색이 아니다. 수업 중엔 즐겁게 하지만 배우러 가기까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탁구장을 운영했던 지인과 얘기를 해 보더니 자신이 남과 겨루는 걸 좋아하지 않아 탁구를 즐기지 못하는 거라고 한다. 실력을 키우고 남을 이기는 재미가 있어야 즐거운데 게임을 하지 않으니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 적성에 맞을 터이다. 집사람은 자전거 탈 때가 가장 좋다고 말하니 그것도 운동이라면 그 지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별 변화 없이 둘이 하는 초보탁구에 만족하고 있다. 낮에 열심히 게임을 즐기시는 어머니들 보다 못한 수준으로.

와글와글하는 탁구장에 비해 태극권 도장은 참으로 조용하다. 수련생도 적다. 아마도 대련이 없어 재미가 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심신수련을 위해 도를 닦는 과정이 되어버린 태극권이 경쟁에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세대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하는 경기 뿐 아니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세계적 유행인 것으로 보아 사람들은 이기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이기는 건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이기는 게 늘 즐겁지는 않다. 극명한 비교를 보이는 진자들의 설움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약산 김원봉의 서훈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김원봉 선생의 삶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서훈이야기가 한창일 때 태극권 선생님이 역사학자 지인에게 들었다며 몽양 여운형 선생 얘기를 하셨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었다고, 역사학자가 그리 말씀하셨다고 하니 나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여운형 평전을 읽었다. 몽양은 1886년에 나셔서 일제강점기를 온 몸으로 저항한 분이다. 강직한 소론계 선비집안에서 태어나서 우리보다 문물이 앞선 서양을 배우기 위해 기독교 학교와 미국인 목사에게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1918년 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약소민족자결주의 성명에 힘입어 신한청년당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을 만들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는 ‘신한청년당이 국내와 국외에서 3.1 독립운동을 추동 거사케 한 활약상을 들어 3.1운동의 진원이요 뿌리다’라고 논문에서 밝힐 정도로 그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것들은 일부러 애써 찾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몽양은 인물과 식견, 인품과 웅변으로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지만 시절이 돕지 않아 꿈을 펴보지 못하고 가셨다. 언론인 송건호 선생께서 ‘지금 우리 민족은 핵의 위협 속에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이 위기를 벗어나 민족에게 통일과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려면 미.소 냉전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민족자주정신이 필요하고, 그러한 점에서 몽양의 정치노선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좌우 양쪽에서 공격을 받으며 좋은 뜻을 펴보지 못한 몽양이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는 장면을 봤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것 같다. 우리끼리 겨루기보다 힘을 합해 잘 살길을 모색하는 게 몽양이 이루고 싶었던 세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르게 보고 힘써 전진하라(正觀邁進)’는 몽양의 휘호다. 그분이 살아 온 길을 보면 저 말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꼭 누군가를 이겨야 한다면 그건 우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제한하려는 자들일 것이다. 전엔 일본이 그랬고 지금은 경제로 온 세계가 전쟁 중이다. 이제라도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 힘써 전진한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느낀 몽양의 가장 큰 미덕은 그렇게 좌우에서 공격을 받아도 누군가를 험담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이고 신사적인 사람이었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취해야 할 태도로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기기 위해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약한 쪽을 살려 함께 강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 승자가 되는 길일 것이다. 무한히 인내하고 또 인내하여 좋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이 바로 이기는 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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